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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05. 2022

우리가 알게 모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들

그 시작은 바로, '나와의 대화'로부터다.

마음과 욕구는 송곳을 닮았다.


마음은 송곳을 닮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욕구가 그렇다. 주머니 속 송곳은 언젠간 옷을 뚫고 나온다. 뾰족한 그 끝은 잠시 숨겨지는 듯 하지만, 이내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송곳은 그 쓰임새가 명확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필요할 때 쓰이면 그것은 도구가 되지만, 그러하지 않을 때 그 뾰족함이 도사리면 그것은 흉기가 된다.


송곳을 주머니에 넣는 그것을 우리는 '억'이라 비유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뾰족하게 날을 세우는데, 우리네 법과 질서 그리고 사회적 정서가 그것들을 잠재운다. 원시시대에서 현대사회로 오기까지, 사회 질서를 위해 타인을 견제하고 규율을 만들어 상대의 마음과 욕구를 제한하는 표면적 합의를 만들어 온 것이다.


질서는 잡혔지만, 마음속 무질서는 그 혼돈을 더했다.

예전보다 마음의 병이 더 많아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014년 제주 검사장이 길거리에서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어 음란 행위를 하다 붙잡혔다. 우리네 상식으로 이 사건은 곧바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뉴스로 대서특필 되었을 것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한 지역의 '장(長)'이 된 사람이 왜 그랬을까? 우리는 그 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꽁꽁 감춰져 있던 송곳과 같은 그 무엇이 그를 뚫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다.


바라는 것과 바라게 만드는 것은 물질문명과 함께 더 커졌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누리고 살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이 마음의 병을 더 키우는 것이다. '돈'이라는 것이 만능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송곳과 같은 마음을 그나마 덜 숨기면서 수많은 욕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게 돈과 물질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돈과 물질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도 잠재적인 송곳들로 우리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나타난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나타난다.

'억압'과 '억제'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다. 이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당장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내 욕구는 잠시 누르고 사회의 가치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참고 참던 화가 폭발하거나 대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거세게 대들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송곳이다. 마음의 송곳. 그러니까, 억압된 것이 나타난 것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가장 기본적인 자기 방어 기제라고 말한다.

원초 자아(id)는 욕구를 따르고 그대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꾸짖는 것이 초자아(Super ego)다. 자아(ego)는 그 사이에서 그 둘을 중재하며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결과를 도출한다. 그러나 그 균형은 늘 일관적이지가 않아서, 우리는 원초 자아의 그것을 충동적으로 표현해내고 만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한 일조차 이해하지 못하거나,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란 후회를 하지 않는가. 그때를 돌아보면, 우리의 원초 자아가 급발진했던 때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1:29:200'.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큰 재해와 작은 재해 그리고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다. 다시 말하면 큰 재해는 항상 사고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큰 재해가 발생하기 전엔, 사소한 여러 정황들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이 법칙을 우리 마음에 적용해도 좋다.

원초 자아에 휘둘려 그러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급발진하거나 폭발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떠한 작은 재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 신호들을 하나하나 알아채 나갈 때,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들


그 신호들을 알아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바로, 우리가 알게 모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자. 아마도 나는 웃고 슬퍼하고 짜증내고 분노하고를 반복했을 것이다. 어느 하루도 한 가지 감정에서 끝나는 날이 없다. 복합적인 감정과 생각들 사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네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를 보며 웃고, 소설을 보며 눈물 흘린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우리의 표현이다. 내 현실을 무언가에 빗대어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영화나 주인공의 감정을 대신해 웃음과 눈물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 그것은 우리네 감정의 결과다. 무의식 속에 해소하지 못하고 남은 기쁨과 슬픔이 송곳과 같이 내 마음을 뚫고 나온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그래서 소중하다.

나의 하루를, 나의 마음과 생각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글이나 그림 또는 노래, 춤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면 더 좋다. 예술이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자 가치인 이유다.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해온 역사적 실체다. 역사는 개개인의 모여 만든 합작품이다. 어느 영웅이나 위인 이야기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시대의 정서는 개개인 정서의 합이자 그 이상이고, 영웅 주위의 수많은 또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확산된다.


요는, 내가 표현하고 있는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섬세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일기가 그렇다. 일기는 내 개인의 역사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들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글쓰기로 확장될 수 있고, 또 다른 형태라면 그림이나 춤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일상에서도 이것들은 가능하다. 내가 하는 일에 열심히고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내 어느 욕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오늘 내 주위 사람들에게 한 말을 떠올려 보자.

내가 점심 먹을 때 느꼈던 맛과 향, 그리고 그 분위기를 헤아려 보자. 내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또 그려보자. 내가 알게 모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 둘, 그렇게 관찰하고 살펴보자.


그러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나는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한데 모아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더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2014년 공연 음란행위를 저지른 제주 지검장의 행동은 분명 잘못된 행위이자 범죄다.

그는 마음을 돌아봤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나 둘, 사소한 마음속 재해들이 그에게 신호를 주고 있진 않았을까. 영화나 소설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통해 그의 마음을 정화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어떤 방법이라도, 음란행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해 나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이내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내 마음도 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이 이랬어야 한다는 건 큰 오만이다. 하여, 나는 내 마음을 돌아보기로 한다. 하나 둘, 글을 써 나가기로 한다. 그림을 그리고, 운동을 하고. 사색을 하며 나를 좀 더 관찰하기로 한다. 내 목숨엔 끝이 있지만, 나를 알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배움은 끝이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어제 내가 남긴 것.

오늘 내가 느끼는 것.

내일 내가 하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은,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들에게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 시작은 바로, '나와의 대화'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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