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Feb 01. 2022

인문학을 삶에 들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

묻고 대답하고, 쓰고 기록해 나가는 행위를 멈치지 않으려 하는 이유다.

인문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문학의 본질에 대해 설파하고 싶다.

인문학은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서 좀 거슬리는 표현이 하나 있다. '따위'라니. '따위'는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벌여 말할 때, 마지막 명사에 붙여 그것이 같은 부류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원뜻 그 자체에 큰 부정적인 요소는 없지만, 듣는 입장에선 말하는 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편리를 위해 좀 더 쉽게 말해버리려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인문학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못했을 때 나에게 이 '따위'라는 의미는 좀 의아한 부분이었으나, 인문학의 본질을 알고 난 지금에는 그것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어느새 인문학은 하나의 거대한 '지식'이 되어버렸다.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를 줄줄 외우면 인문학에 통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본질은 무엇일까?

'인문학' 글자 안에 이미 답이 있다. 가장 첫 번째에 있는 글자. '사람 인(人)'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을 들여다봐야 한다. 왜 이렇게 인문학이 왜곡되고 그 본질이라는 선로를 벗어나 탈선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들여다보지 않고 지식과 학문에만 심혈을 기울이려는 이 시대의 흐름에 나는 약소하게나마 반기를 드는 것이다.


진정한 인문학의 시작


언어, 문학, 예술, 철학과 역사는 사람들이 만든 일종의 '부산물'이다.

머리와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끄집어내어 예술로 승화시킨 것들. 물론, 여기엔 사람들의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고,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데 분명코 도움이 된다. 문제는 사람이라는 본질을 떼어 놓고 보려는 지식에 대한 정복 욕구들이다. 철학자의 이름과 사상을 줄줄이 외우고, 공자와 맹자의 말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완성이라고 믿는 정서. 부산물에 돋보기와 현미경을 갖다 들이댄다 한들, 그 본질을 아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제는 그 돋보기와 현미경을 부산물이 아닌 본질에 갖다 대야할 시간이다.

본질은 바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우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본질은 바로 나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나'라는 마음의 호수에, '왜'라는 돌을 던져보자.

나는 그것이 진정한 인문학이라고 믿는다. 호수에 던진 돌이 잔잔하게, 때로는 울렁거릴 정도로 만들어내는 그 물결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얻어낼 수 있다. 


진정한 인문학의 시작이다.


인문학을 삶에 들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 글쓰기


내 마음에 질문을 던져 시작된 인문학을 내 삶에 들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는 인문학의 속성인 '언어', '문학', '예술', '철학' 그리고 '역사'를 아우른다. 그 모든 것들이 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글쓰기'도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누가 써 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써 내려가는 것은 '부산물'이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내포한다.


우선, 글을 쓰기 위해선 소재를 찾아야 한다.

글쓰기를 한 번이라도 시도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람은 영감을 받아 특별한 것을 써내려고 하는데, 그 특별한 소재는 이내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일상에서 소재를 찾아야 하고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보지 않거나, 아무렇지 않은 걸 특별하게 표현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보지 않는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

바로 '왜?'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내 마음의 호수에 왜라는 돌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이다. 묻고 생각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이다. 정답은 아니라도 나만의 해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고전을 달달 읽으며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크고도 깊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더불어, 글쓰기는 '기록'이다.

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에 매몰되는 게 아니라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지혜를 갖기 위함이다. 굴욕의 역사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며, 잊히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지금의 삶을 당당하게 꾸려 나갈 수 있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에도 통용되는 진리다. 기록된 나의 역사는 지금의 나를 인식시키고, 미래의 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렇게 계속해서 글을 쓰고 기록을 해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나의 표현력에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다.

글쓰기는 잔잔하지만 강력하고 사나운 행위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힘과 내 삶에 대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쓰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는 이 느낌을 나는 너무나 사랑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받는 선물은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다.




다시, 인문학은 사람을 탐구하는 것이 주목적이고 그것이 본질이다.

'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를 탐구하는 것이, 그것을 시작으로 남을 이해해 가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란 결론이다.


더불어, 인문학을 내 삶에 들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글쓰기'라고 온 체중을 실어 말한다.

글쓰기를 통해 이제 나는 겨우 엄한데 들이대던 돋보기를 내 마음에 갖다 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바쳐도 알지 못할 내 마음을, 그래도 조금은 이해하고서 이 세상과 작별해야 하지 않을까.

묻고 대답하고, 쓰고 기록해 나가는 행위를 멈치지 않으려 하는 이유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길이 있는 곳에 뜻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