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마음 설명서
몸이 아프면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거나 아니면 그저 쉴 때가 있다.
몸의 증상은 대체로 뚜렷하다. 그래서 뭐를 해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아플 땐 이야기가 좀 다르다.
당최 그 원인을 알 수가 없고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그 원인은 뚜렷하지만 당장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는,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할 때가 있다. 이건 원인도 모르고 해법도 모르는 경우다. 그저, 간혹 마음은 그렇게 아파야 하나 보다라며 체념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 둘, 나이를 먹어가며 경험을 쌓는다.
원인과 해법은 모르지만 마음이 헛헛하고 아플 때. 저마다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마음을 달랜다. 일종의 '내 마음 설명서'가 다 있는 것이다. '마음이 이럴 땐 이렇게 하시오.'란 문구와 함께. 그러니까, 마음을 나아지게 할 이런저런 시도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 설명서는 다음과 같다.
마음이 헛헛하고 아플 땐 다음과 같이 하시오.
첫째, 갓 지은 밥을 큰 숟가락으로 퍼 한 입 가득 넣는다.
'헛헛하다'란 말은 마음의 허전함을 이야기 하지만, 사전적 의미의 첫 번째는 '먹은 것이 없어서 무언가 먹고 싶은 느낌이 있다'란 말이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할 때, 실제로 몸의 허기짐도 함께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때 필요한 건 바로 탄수화물이다.
고지방 저탄수화물이 유행하는 시대지만, 탄수화물이 주는 위로는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밥의 민족이기도 하거니와 탄수화물을 멀리하면 살은 뺄 수 있지만 인내심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고, 넓은 마음과 배려는 탄수화물에서 나온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헛헛하고 슬플 때.
나는 집에 들어와 갓 지은 밥 한 숟가락을 퍼 한 입 가득 넣는다. 뜨거워 입 안이 얼얼하지만, 금세 퍼지는 밥의 향과 입 안 가득한 포만감이 마음을 달랜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영혼이 데워지는 느낌이다. 동시에, 왠지 모를 울컥함이 올라온다. 입 안 가득 흰쌀밥을 오물거리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이 무슨 궁상이냐 싶지만, 그것은 어쩌면 내게 있어 거룩한 카타르시스의 과정이라 해도 좋다.
씹어 삼킨 음식은 내장만을 채우지 않는다.
이내 마음과 영혼을 아우른다. 영혼이 몸을 움직이는 것인지, 몸이 있어 영혼을 거둘 수 있는 것인지를 속단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의 허기짐을 달래다 보면, 마음도 채워지는 것이 마음이 허할 때 내가 갓 지은 밥을 한 입 가득 넣는 이유다.
둘째, 가족들을 이유 없이 안는다.
나에겐 결핍이 많다.
그중에서도 사랑이라는 결핍은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모자라게 자랐고, 모자란 것에 대한 미련과 아픔이 여전하다. 그래서 나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컸다. 하루라도 빨리 내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이유다.
그런 내게 있어 가족은 이루어진 기적이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어른이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부모가 될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어른이 되어가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그것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정말 특별하고도 쉽지 않은 일. 세상 돌아 가는 게 그저 그렇다는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가족과 관련이 있다.
가족 내의 아픔은 둘째 치고, 나는 우리 가족을 건사해야 한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책임지고 거둬야 한다는 것은 수많은 아픔들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내가 누군가를 더 많이 챙겨야 한다는 것 또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일까.
마음이 힘들 때. 나는 그저 가족들을 꼬옥 안는다. 별 다른 설명은 하지 않는다. 아주 잠시라도 안아 그 체온을 느껴본다.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실체를 마주하는 일이다. 내 마음의 아픔은 추상(抽象)이지만, 내 느낌은 구상(具象)이다.
내 마음이 헛헛하고 아픈 이유.
내 마음이 헛헛하고 아파도 되겠다는 다짐.
가족들을 말없이 안는 이유다.
셋째, 글을 쓴다.
돌이켜 보니 어쩌면 나는 '자아 성애자'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르시시즘과 엄격히 구분한다. 내가 말하는 자아는 그 원뜻의 '나의 나됨'을 말하고, 성애 한다는 것은 그것을 더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다.
즉, 마음의 아픔을 느끼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며 그것을 해결하거나 달랠 수 있는 존재 또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자아를 발견하고 알아가고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글쓰기만큼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건 없다. 글을 쓰기 위해선 내 생각과 마음을 끄집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위해 생각과 마음을 헤집다 보면 결국 어느 시공간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나는 못났고, 처량하고, 불쌍하고 때론 자랑스럽다.
생각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했던 또 다른 나를 조우한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다.
그 또 다른 나가 결국 내 헛헛하고 아픈 마음을 달래줄 것이기 때문이다. 못났던 모습을 돌이키며 반성하고, 처량하고 불쌍한 나는 오늘의 나를 위로하고, 자랑스러웠던 나는 다시 잘해보라며 어깨를 토닥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내 손 하나 제어할 수 없을 때.
움직이고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 기어이 글을 쓰는 이유다.
나는 나를 알아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내 마음의 헛헛함과 아픔을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위로하고 보듬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과연 자아 성애자답게 말이다.
몸이 아닌 마음이 힘들다면, 오늘 하루는 내 마음 설명서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대충 읽고 어느 구석에 박아 놓은 건 아닌지. 주섬주섬 그것을 주워 들어 나 자신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가 보는 것이 절실하다는 걸 느낀다.
경험이 쌓일수록.
그 뾰족해지는 길목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더 자주 만나게 된다.
어쩌면 그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삶은 그렇게 내 마음을 헛헛하고 아프게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