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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1. 2022

나는 누구인가

아니,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까?

그 누구도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을, 그누구나 안고 산다. 선뜻 대답할 수 없기에, 묻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답이 없어 보이는 것에 대한 질문은 그렇게나 늘 두렵다. 특히나 객관식이나 단답식, 명확하게 맞아떨어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네 정서와 우리네 교육 체계를 떠올려보면 더 그렇다. 그러하기에, 각박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질문은 쓸데없는 질문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저 남 보다 앞서고,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정작 '나'는 뒷전에 두고 살아가는 비극이 생기는 이유다.


그러게.

'나'는 누구일까. '나'라는 '자아'의 개념은 의식과 함께 출발한다. 그리해야 나는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를 물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참으로 이상하고도 흥미롭다. '나'에게 '누구'냐고 묻는 것은, 나를 제삼자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자체도 '나'와 '나'를 분리하는 기준이거니와, 나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는 것은 아예 별개의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이 질문은 어찌 보면 자가당착에 빠진 엉뚱한 존재의 무의미한 발버둥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허무주의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걸 부정하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빗대려 하는 게 아니다. 절대적인 건 없다는 걸 인정하고, 신이나 진리 등에 대한 담론이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동적 허무주의가 내가 말하려는 결과 더 가깝다.


이러한 허무주의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실존주의와 같은 사람의 능동성을 부각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그래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더불어, 인간의 주관성에 큰 중점을 둔다. 즉,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삶은 절대적인 무언가(존재하지 않는 외부의 것)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내 안에 있는 주관) 자신의 삶과 가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므로 존재하는가,
존재하므로 생각하는가?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의심할 수 없는 명제를 만듦으로써, 이 세상 많은 사람의 존재를 스스로 각인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실존주의 사상으로 돌이켜보면, 우리는 존재는 본질에 앞섬으로써 존재하므로 생각할 수 있다는 명제 또한 도출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가, 존재하므로 생각하는가?

두 질문에 사용된 단어의 순서가 바뀌어 알쏭달쏭한 질문이 되었지만 분명한 건, 단어의 공통성을 보면 그리 어렵지도 않다. 그 둘을 엮어 보면 '존재'는 '생각'한다는 것이고, '생각하는 존재'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면 되니까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사이에는 '생각'이라는 매개체가 있다.

생각하며 쓰고, 생각하며 읽는 두 존재의 만남은 이렇게 성사되는 것이다.


즉, 내가 누구냐고 묻는 것은 '나'의 '존재'를 '생각'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다.

자아를 생각하고 인식하는 존재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자격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고정값일까?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속 시원히 답한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며, 한을 풀지 못한 영처럼 구천을 떠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누구의 답이나 정의가 아니다. 이 질문의 대답은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훌륭한 철학자가 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며, 그의 느낌과 삶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정체성', '자아', '페르소나'등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것의 모든 합이 나를 모두 설명할 순 없다. 내 많은 부분을 이야기해줄 순 있지만, 어딘가 모자라는 것은 절대적 상대성이자, 상대적 절대성이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하여 아직도 내 정체성이나 자아 그리고 페르소나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바쁘다는 핑계로, 세상이 각박하다는 변명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가려면, 내가 누구인지를 조금이라도 규명하려면 우선 이것들이라도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또 하나.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질문을 바꿔 보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는 왜 꼭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누가 만든 고정값일까? 고갱의 그림 중에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란 제목이 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더불어 나는 나에게 던졌던 질문을 바꿨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로.


전자의 질문은 결론을 내려는 질문이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내 삶은 통째로 바뀌게 될까? 아니다. '그래서 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후자의 질문은 과정을 지향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아니 알아가려 한다면. 내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스스로 규명해야 한다. 이것은 삶의 목적과도 연관이 되어 있다. 즉,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이다. 


'자아'의 진정한 뜻


'자아'란 말은 '스스로 자'와 '나 아'로 되어 있다.

그 뜻은 단순한 '나'가 아니다. 스스로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나됨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로도 들린다. 더불어, 나는 나에게 있어 누구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속 뜻도 보인다. 이 또한 과정을 닮았다. 나는 평생을, 스스로 내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건사해야 한다.


그래서 '자아'란 말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와 더 맞닿아 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과정이다.

그 과정에 내가 있으며, 내가 추구해 나아가는 그 과정과 방향에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규정하고 끝내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규정하고 규명해 나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한평생을 살아 두 눈을 감을 때조차, 어쩌면 우리는 그 과정의 여정을 마무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나'라는 우주를 탐험하고 유영한 그것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질문을 한다고 해서, 꼭 답을 내놓아야 할 필요는 없다. 질문과 답 사이에서 고뇌하는 '나'를 인식할 수 있다면. 때로는 질문을 바꿔가며 과정이라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단답으로 무언가에 대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도 나의 나됨을 대신해줄 수 없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자아를 대신해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아니.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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