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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03. 2022

취미가 밥 먹여주는 시대

내 취미의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 없는 합목적성'


'목적'은 아직 현실성을 지니지 않는 표상 또는 개념이다.

이 목적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질을 '합목적성'이라 말한다. 부분이 전체에 알맞고, 또한 부분들도 서로 알맞은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합목적성'에서 '목적'을 빼면 그것은 존재할 수 없는 단어가 될까?

그렇지 않다고 칸트는 말한다. 예술 작품을 예로 들어 볼 때, 작품의 대상이 그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심미적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합목적성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취미'란 제목을 꺼내어 놓고 갑작스레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왜 거론하고 있는 것일까?


'취미'란 말만큼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잘 어울리는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것은 취미란 말의 진정한 뜻을 알고 나서부터다.


알지 못하면 가장 가벼운 단어, '취미'


취미만큼 가벼운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취미가 뭐예요?'란 말은 인사말과도 같고, 인사말과도 같다는 말은 일상적이란 의미다. 일상적이란 의미는 특별하다기보단 의례 건네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대답하는 사람 또한 그 의도를 파악하고는 그리 진중하게, 정성을 들여 자신의 취미를 구구절절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런데, '취미'란 단어를 찾아보았을 때.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더불어, 간단하거나 가볍지 아니한 그 뜻을 몇 번이고 읽었다.

'취미(趣味)'

1.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ex. 취미 생활)
2.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ex. 취미를 기르다)
3.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ex. 수학에 취미가 있다)


고백하건대, '취미'란 단어를 두고 두 번째와 세 번째에 대한 뜻을 알아채거나 그러한 뜻과 의도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

취미를 기른다거나, 무언가에 취미가 있다는 표현은 쉽게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용어의 수준이었다. 즉, 습관처럼 써왔을 뿐 그 뜻을 헤아린 적은 없다.


더 재밌는 점은, 철학에서는 '취미'를 판단력으로 간주한다. 

그라시안이라는 철학자는 '취미는 충동과 자유, 동물성과 정신의 중간적인 것으로 각종의 일들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구별하고 선택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칸트 또한 이러한 개념을 정립하여 '취미 판단'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쯤 되면, 내가 알고 있던 그 단어가 맞나... 란 생각까지 들 정도다.

'취미'란 말은 이처럼 다의적이며, 그것은 멋과 맛, 그리고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상태를 의미함과 동시에, 어떤 것의 맛을 감지하는 능력도 의미한다. '맛'은 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칸트는 '미각'을 '감관 취미'라고 표현했다. (*감관: 동물의 몸에서, 밖으로부터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기관/ 작가 주)


취미엔 어떤 목적이 있을까?


가장 가벼운 단어를, 가장 무거운 단어로 만들어 보았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내가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그래서 '취미엔 어떤 목적이 있을까?'이다. 취미엔 목적이 있을까? 아니면 목적이 없어도 되는 걸까?


취미의 본래 뜻으로 돌아가, 가장 보편적인 뜻을 살펴본다면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 바로 취미다.

그 목적은 '즐거움'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즐거움'의 목적은 무엇일까? 기분을 좋게 하려고? 행복하게 살려고?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반드시 취미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취미가 없어도 즐거울 수 있다면, 취미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취미'란 말과 개념 그 자체에는 목적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단어는 소멸하지 않는다. 소멸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근거한다. 목적 없이 취미를 갖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미각과 심미적 안녕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합목적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또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 목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가늠해야 하는데 그것이 규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취미란 활동이 중단되지는 않는다.


취미는 돈이 될 수 있을까?
내 취미의 목적은 무엇인가?


취미가 돈이 되는 시대다.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다 보면,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정서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 


왜일까?

콘텐츠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것이 부족한 시대 그러니까 먹고살기 바빴던 시대엔 '취미'는 사치였다. 당장에 곯은 배를 채워야 했고, 무너진 기간산업을 재건해야 했다. 그 시대의 콘텐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콘텐츠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더불어 그 콘텐츠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고,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먹고살만하니, 몸을 채우기보단 마음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다. 재미와 자극을 추구하게 된 배경이다. 


취미의 두 번째, 세 번째 뜻에서 공통점을 찾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둘 다 '마음',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감정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돈이 될 수 있다. 수천만장의 앨범을 판 가수는 수천만의 감정을 움직인 사람이다. 수천만 권의 책을 판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지갑을 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지갑을 연 건 우리네 손이 아니라, 마음이다.




취미가 돈이 되니, 취미가 밥 먹여 주는 시대라고 말해도 어색하지가 않다.

이제는 취미도 '목적'을 가지고 선택해야 하는 시대다. 돈이 될까 하여 배우는 취미들도 상당하다. 재미로 시작하여 돈을 버는 사람, 아예 돈을 벌기 위해 특정 취미를 갖는 사람. 목적의 정도와 그 구분은 명확하지가 않다. 명확하지 않은 이 지점에서, '취미'는 또다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대변한다.


나의 취미는 무엇인가?

내가 즐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내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가?


이제는 누군가 내 취미를 물을 때, 음악과 영화 감상이라고 말하는 대신. (또는 그렇다고 둘러대 놓고.)

내가 세상을 향해 내어 놓는 판단과 심미적 프레임은 무엇인지를 떠올리려 한다. 


내 취미의 목적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합목적적인 방향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그 어떤 무엇과도 부합하게 될 것이다.


가령, 목표 없이 시작하였으나 목적은 분명하게 써왔던 글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콘텐츠가 되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와 돈으로 환산되고 있는 지금 내 경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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