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May 13. 2022

일상 속 카타르시스 찾기

배설 후 찾아오는 초췌함이 아니라, 배출 후 느껴지는 후련함.

카타르시스는 마음의 정화


카타르시스(katharsis)는 그리스어로 '정화'를 의미한다.

마음속 억압된 감정이나 응어리가 언어나 행동을 통해 외부에 표출됨으로써 정신적,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아 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2년마다 열린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을 관람할 때의 체험을 카타르시스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그는 인간을 한계까지 몰고 감으로써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 환희에 이르게 되는 점을 관찰했는데,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체험 속에서 인간은 한계와 무력함을 느끼지만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인간은 이성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초월을 경험하게 되면서 인간의 영혼은 한 차원 더 고양된다고 보았다.


그리스어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해서 어려운 개념으로 여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희극(Comedy)을 보며 한바탕 웃거나 비극(Tragedy)을 보며 펑펑 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순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평정심을 되찾는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는 순간이다. 나 대신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인물을 보며, 버림받은 주인공과 함께 울고 우는 바로 그 순간. 감정이란 이입이 가능해서, 함께 울며 우리네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겪으면, 말 그대로 무언가 뻥 뚫린 기분이 든다.


감정은 물리적이지 않지만, 물리적 속성을 지닌다.

억압된 것은 언젠가 폭발하거나 어느 사이를 삐져나온다. 그것이 소멸된다면 그것은 존재의 사라짐을 뜻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폭발하기 직전의 마음을 안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분에 못 이겨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거나 원치 않는 소비를 하고 후회한다.


어질러진 방을 청소하듯,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 해줘야 한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은 몰았다 한 번에 하는 것보단, 주기적으로 해주는 것이 좋다. 주기적으로 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일상에 녹여내는 것이다.


일상 속 카타르시스 찾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관객의 연민과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배설시키고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니체가 이해한 비극은 이와 좀 달랐다. 그는 이러한 비극을 '감정적 설사'로 규정한 듯하다. 니체 이전의 비극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비극을 제외하면 관객의 부정 감정들을 설사시켜 초췌하고 탈진하게 만드는 것으로 변질되어왔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소위 말해 '막장 드라마'라는 것을 보며 우리는 미간을 찌푸리지만 또 이내 우리 영혼은 탈진하고 초췌해져 다시 그것을 찾는 중독을 반복하고 있다.


니체가 읽은 고대 그리스 비극은 그런 악순환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비극을 인지함으로써 그것을 돌파하고 수용함으로써 종내에는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고뇌였다.


그렇다면 감정을 설사하는 게 아니라,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청소


앞서 말했듯, 우리네 감정은 물리적 속성을 따르며 동시에 이입이 가능하다.

어질러진 방을 청소하는 것은 '정화'라는 행동 그 자체다. 방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고, 어질러진 모든 것을 감정의 응어리라고 보면 된다.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정돈되지 않은 것을 제 자리에 놓고.

찌든 때를 박박 닦아 원래의 색을 되찾고.


그 과정과 활동은 마음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쌓인 감정을 걷어내고.

정돈되지 않은 마음을 제자리에 놓고.

찌든 상처를 닦아내어 원래의 마음을 되찾고.


다시 어질러질 방이고 다시 어수선해질 마음이지만.

다시 청소를 하며 정화하는 그 과정을 삶의 숙제이자 축복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둘째, 감정이입


나는 간혹 사물에 내 감정을 이입해보곤 한다.

아끼다 말라비틀어진 물티슈를 보며 드는 생각은 생각보다 애처롭다. 기능을 다하여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나, 소중하게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는 옷이나 신발들에도 그렇다.


흔들리는 건 언제나 내 마음이다.

왜 인지 모를 그 무수한 이유들은 무언가에 내 감정을 이입할 때 정리되고 정돈된다. 정리되고 정돈되어야 내 마음은 정화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게 닥친 현실은 아니지만, 아마도 주인공에게 닥친 일들은 내가 과거에 겪었거나 앞으로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연계하여 기어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에, 미래의 불안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폭발한 그 순간. 감정은 이입되고, 눈물은 터져 나온다.


마음이 요동할 땐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그렁거린다.

꼭 마음이 뒤흔들릴 때 말고, 의도적으로 감정 이입을 하여 그때그때 내 마음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글쓰기


끄적거리기만 해도 무언가 풀리는 게 글쓰기의 매력이다.

마음속 억눌린 것들은, 폭발하거나 삐져나온다고 했다. 그것을 무엇으로 표출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수준이 달라진다.


혈기왕성하던 어린 시절엔, 주로 육체적인 무언가로 발현이 되었다.

싸우거나, 소리치거나. 달리거나 운동하거나. 좀 더 나이가 들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그것은 쇼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말 그대로 '동(動)'적인 표출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요하다. 또한 필요하다. 움직임으로써 얻는 정화의 순간은 숨이 헐떡거리며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지나치면 좋지 아니하다는 걸 누구나 안다.

지나친 '동(動)'을 잠재워 균형을 맞춰 주는 것이 바로 '정(靜)'이다.


정적이기 위해선 숨을 골라야 한다.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한다. 마음을 들여다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상태와 현황. 어느 곳을 청소하고, 무엇을 정리 정돈해야 할지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의 응어리는 자음과 모음으로 치환된다.

그것은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된다. 이내 그것들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메시지가 된다. 메시지를 뒤따라오는 것은 깨달음과 성찰이다. 토해 놓은 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머금고 있었는지를 안다. 무엇이 내 속을 이토록 헤집어 놓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일상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알게 모르게 나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고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봐야 할 건.

그 카타르시스의 과정이, 정화의 결과가 나를 탈진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힘을 북돋아 긍정의 에너지를 얻게 하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배설 후 찾아오는 초췌함이 아니라, 배출 후 느껴지는 후련함.


그 둘의 차이는 크다.

그 둘의 차이를 아는 것이 바로 통찰이자 삶의 지혜다.


정말로 삶은.

정화의 연속이다. 정화를 하려면 어수선해져야 하고, 어수선해지면 정화하고.


그 반복이 달갑지 않지만, 어떻게든 일상의 카타르시스를 찾아내며 하루하루를 또한 살아내야 하는게 바로 우리네 숙명이다.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이라는 강박, 불행이라는 속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