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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4. 2022

지옥은 조급함 안에 있다

지옥을 덜 경험하기 위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답이 나왔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고,
지옥은 조급함 안에 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악마를 마주한다.

그 악마는 사람일 수도, 상황일 수도, 쉬워만 보이던 어떤 일일 수도 있다. 처음엔 좋은 사람이었지만 알면 알수록 이상한 사람. 겉으론 괜찮은데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악화되는 상황.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하려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들이 그렇다. 말 그대로 요소요소 안에 우리를 방해하고 시험하는 악마들이 득실 대는 것이다.


그러나 악마가 득실댄다고 그곳은 지옥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악마를 마주하고는 오히려 많은 배움을 얻고 한 뼘 더 자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디테일 안에 숨어 있는 것이 '악마'일까란 합리적 의심도 든다. 사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란 말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신은 천사와 악마를 조물 했으므로.

디테일 안에서 성장하면 천사를 만난 것이요, 그것 안에서 무너지면 악마를 마주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떤 곳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내세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 안에 갇힌 그것은 실체가 증명된 적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현세에도 지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옥'은 '조급함'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급함이라는 감옥


해외 출장 중이었다.

낯선 나라의 고속도를 달리다 현지 경찰에게 붙잡혔다. 그 나라는 부패가 심하여, 외국인을 본 경찰은 대부분 차를 세우는 곳이었다. 나는 과속을 하지도, 신호를 위반하지도 않았다. 외국인에게 돈을 받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 경찰은 차를 세운 것이다.


당시 나는 바이어 상담을 가는 길이었고,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경찰이 언제 나를 놔줄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경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묻는다. 바이어 상담이 있다고 사정 설명을 한다.
B) (조급함을 내보이지 않고) 느긋하게 대기한다. 마음은 급하더라도.


내가 택한 것은 B였다.

면허증을 보여주고 하염없이 대기하라는 경찰의 말에,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마음은 들끓었지만, 조급함을 내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별 볼일 없다는 듯 10분도 채 안되어 가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후, 그 경찰은 다른 외국인의 차를 세우기 위해 팔을 크게 휘젓고 있었다.


내가 만약 A와 같이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는 지옥을 경험했을 것이다. 경찰은 원하는 액수를 받아내기 위해 나를 놓아주지 않았을 테고, 내가 조급해하는 모습을 약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1초를 1년처럼 느끼며, 계약이 파기되면 어떡하지?', '바이어와 연이 끊기면 어떡하지?'란 걱정으로 금세 머리가 하얘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급함을 내보이는 순간, 나는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그 문을 내 손으로 잠그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더불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감옥의 구들장은 뜨겁게 달아올라 지옥이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조급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조급하다'란 말은 '참을성 없이 매우 급하다'란 뜻이다.

급해서 참을성이 없는 건지, 참을성이 없어서 급한 건지. 나는 이 둘 모두가 원인이자 결과라 생각한다.


우리 삶은 그렇다.

급하게 만들고 참을성 없게 만든다. '큰일 났다'란 생각을 하는 순간 참을성 없이 우리는 조급해지는데, 삶의 요소요소엔 '큰 일'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일을 만날 때면 우리는 한 번에 무언가를 바꾸려 든다.

그것이 한 번에 바뀌지 않으면 포기하거나, 큰 손실을 보거나, 돌이킬 수 없는 후회스러운 일을 벌이고 만다. 그것은 마치 잃은 돈을 한 번에 만회하기 위해 더 큰돈을 들여 도박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 잃을 걸 알면서도 더 많은 돈을 빌려 탕진하는 그 마음은 머리로는 이해 안 되지만, 조급한 마음을 대입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공자는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산을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산을 들어 올릴 것이 아니라 돌부터 옮겨야 한다. 산부터 들어 올리려 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지옥에 갇힌다.


이러한 조급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대답은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쉽다.


바로, 우리 마음으로부터다.


아니, 조급함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조급함이 어디에서 발현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렇다면 질문은 '어디에서'가 아니라 '왜'여야 한다.


그러게, 우리는 왜 조급해하는 것일까?


불편한 상황을 우리는 견디기 힘들어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 불안을 떨쳐 버려야 한다는 강박.


나는 손에 끈적한 것이 묻으면 마음이 너무나도 불편하다.

이것을 어서 닦아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힌다. 화장실에 가서 씻던, 물티슈로 닦아내던. 어떻게든 빨리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 나는 다른 것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한다. 조급함의 감옥과 지옥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조급함에 대한 강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생존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생존하고자 하는 강박이 오히려 생존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의 만성 질병 스트레스가 그렇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위기를 벗어나는 힘과 자극제가 되지만, 그것이 심하면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


조급함이 어디에서, 왜 오는지를 살피는 것이 좋다.


그저 조급하여 뛰기 전에.

내가 왜 뛰어야 하고 이러한 마음은 왜 생겨 났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면 나는 경거망동했다.

조급했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조급한 이유를 몰랐고 그러한 내 마음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조급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니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곤 했다.

스스로의 감옥에 갇히고, 조급함의 지옥에 갇히고.


그렇다고 나는 지옥을 마다하지 않는다.

천국만을 앙망하지도 않는다. 조급함이 있어야 느긋함이 있고, 느긋하기만 해선 안되니 조급할 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삶은 굴러가고, '강과 약' 그리고 '명과 암'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조급함을 조급하게 발현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조급함은 나를 위한 마음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찬찬히 바라볼 여유를 가지고자 한다. 가장 중대한 실수는 조급함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 실수들이 나를 괴롭히고, 내 자존감을 바닥으로 내칠 때 악마는 미소를 짓고 지옥은 시작된다.


지옥은 조급함 안에 있다.

조급함은 마음 안에 있다.

마음은 내 안에 있다.


지옥을 덜 경험하기 위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답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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