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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07. 2022

삶은 '인싸' '아싸' 그리고 '마싸'

미약하나마,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삶'과 '선'의 상관관계


삶엔 '선(Line)'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경계는 분명하고도 강력하다.


그 선은 자아와 타인을 나누고, 개인과 다수를 구분한다.

자아와 타인 사이의 선은 '영역'의 개념이다. 선을 넘어 발을 내딛을 때, 우리는 흠칫 놀라거나 불쾌해한다.  내 영역이냐 아니냐가 관건이다. 그 선의 기준은 사실 절대적이지 않다. 너무나도 상대적이어서 때로 그 선은 점선이 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겐 두 겹으로 된 실선이 될 수도 있다. 선을 침범하는 것이 유쾌한지, 불쾌한지는 저마다의 상황과 감정이 결정한다. 시대의 각박함과 더불어 개인의 색채가 더 짙어지는 요즘, 영역을 상징하는 이 선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개인과 다수를 구분하는 선은 '위치'의 개념이다.

안(in)에 있는지, 바깥(out)에 있는지를 식별한다.


삶은 '안(in)'에서 시작하여
'바깥(out)'으로 이동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안(in)'에 존재하게 된다.

모두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궁에서 그저 나왔을 뿐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할 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축복한다. 그러다 뒤집거나 걸음마를 하기라도 하면 모두는 요동한다. 대단한 걸 하지도 않았는데 난리가 난다.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인사이더(인싸)'가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받던 '인정'과 '박수'는 점점 줄어든다.

경쟁의 세계로 돌입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를 인정하고 축복하고 배려할 여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러하지 말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 때는 공부로, 사회인이 되어선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다른 누군가를 앞서지 않으면 내가 뒤처지는 냉혹한 현실에서 많은 이들은 '아웃사이더(아싸)'가 된다. '사회생활'이라 함은 '조직'이 기반이므로, 어느새 '조직'은 '안(in)'이란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고 조직에 순응하지 못하는 이를 가리켜 우리는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자'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정의를 볼 때, 나는 어느 곳에선 '인싸'이고 또 어느 곳에선 '아싸'다.

본능적 욕구를 따르면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나는 '인싸'이고 싶다. 태어나면서부터 맛봤던 그 '인정'의 달콤함이 몸과 영혼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의 쓴 맛과 타인과의 갈등을 겪으며 나는 항상 '인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삶은 매우 고단하다. 항상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마음은, 욕심과 욕망으로 변질되어 세상에 대한 분노만 키우는 에너지가 될 뿐이다. 돌이켜 보면, 혈기 왕성할 땐 분노의 에너지가 가득한 상태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젠, 스스로를 '아싸'라 말하며 안에서 오히려 한걸음 떼어 바깥에 위치하는 경우도 많다.

굳이 '인싸'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편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난도질당해도 모를 정도로 경쟁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던 그 마음은, '인싸'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몸은 선 안에 있을지 몰라도, 내 마음과 영혼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도 모를 그 웃지 못할 상황은 스스로에게 환멸을 불러왔다.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 나아갈 때


이젠 내가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를 굳이 구분하거나,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규정하며 스스로 불안해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일정의 선 안에 존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 휩쓸리거나 저리 휩쓸리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또는, 어딘가로 휩쓸린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것을 '마이사이더(마싸)'라고 명명한다.

안에 있느냐, 바깥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는 어디에 있느냐'를 자각하는 것이다.

더불어,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나 자신과 대화할 때 가능하다.

그러하면 더 이상 누군가 나를 안에 넣었다 밖으로 빼었다를 할 수 없다. 누군가 정해 놓은 선 안에 간신히 들어왔다고 헐떡일 필요가 없다. 더 이상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다닐 일도 생기지 않는다.


미약하나마,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마이사이더(마싸)'다.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어느 선에 들어가려고 또는 어떤 선에 닿지 않으려고 나는 발버둥 쳤을까.


그러는 사이 '나'를 잃은 건 아닐까.

'나'를 두고서라도 들어가야 하는 선은 과연 무엇인가?


'안'과 '바깥'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건 얼마나 고된 일일까.

그러나, 그만큼 값지고 가슴 뛰는 일이 또 있을까?


내가 가야 할, 만들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


나는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나를 붙들고 대화한다.


글을 쓰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조금씩 나만의 길을 묵묵하게 만들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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