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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14. 2022

패배는 보류하는 것

'도망'보다는 '패배를 보류'하는 것

살다 보면 문득 기분이 개운하지 않을 때가 있다.

어딘가로 숨어버리거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훅 하고 올라올 때.


바로, 패배감이 엄습하는 순간이다.


'패배'란 싸움에서 져 도망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감'이 붙어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과, 누구와 싸운 것일까?

나는 그것을 '세상'과 '사람'으로 구분한다.


맞서 싸운 '무엇'은 곧 '세상'이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 뜻대로 되는 건 거의 없거나 손에 꼽을만하며, 나에게 현실보다 더 혹독한 '현실'을 선사한다. '현실'이란 말은 참으로 매섭다. 인정사정이 없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과는 산산조각 나듯, 삶에는 예외가 없다. 그러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군데군데에서 일어나고,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가뭄에 콩 나듯 이루어지되 대부분은 내 생각과는 반대로 흘러간다.


세상과 대척하기도 힘든 이 판국에.

싸움의 대상은 '누구', 그러니까 '사람'으로까지 확장된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 대부분의 것들은 바로 사람으로 인함이다. 사실, 세상은 사람의 군집이라고 볼 수 있다. 너와 나의 엮임이 곧 세상이며, 세상은 그 엮임의 갈등을 모아 놓은 집합체다. 어찌 되었건 참으로 피곤한 것이 사람이다. 타인은 물론 가족, 심지어는 싸움이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인 경우도 많다.


뜻대로 되지 않는 많은 것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나 비교로부터 오는 허탈감.


이것이 '패배감'의 원인이다.

그리고 '패배감'의 주성분이다.


그러나 삶의 축복이자 저주는 바로 '지속성'에 있다.

지속되는 것의 속성엔 '끝'이 없다. 고로, 이길 때까지는 이긴 게 아니고, 패배할 때까진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게 성립된다. 실제로, 삶의 요소요소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많다. 지금은 이긴 것 같지만 그때는 졌기에 가능한 승리도 있다.


병법서인 '삼십육계'는 승전계, 적전계, 공전계, 혼전계, 병전계, 패전계로 구분되어 정리된 36가지 싸움의 기술을 담고 있다.

이 중 마지막 '패전계'의 '36계'는 '도망치는 것도 뛰어난 전략'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36계 줄행랑'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강한 적과 싸울 때는 퇴각하여 다시 공격할 기회를 기다리는 것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잘 도망쳐야, 다른 기회를 잘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도망 간 다음이다.

도망하여 패배가 연속되면 그것은 전략적인 도망이 아니다. 그저 비겁한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세상과 사람)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무인도에 홀로 있더라도 섬과 바다 그리고 날씨라는 '세상'은 존재하고,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나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무인도에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홀로 무인도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도망'보다는 '패배를 보류'하는 것이다.

앞서 삶은 지속된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 '끝'이라는 허무함이 몰려오면, 나는 그 순간을 보류해 '과정'으로 그것을 승화한다. '보류'의 힘이다. 패배했다고 주저앉은 걸, 잠시 쉬는 것이라고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은 패자의 변명일까?

아니면 승자의 안목일까?


이 또한 단정을 '보류'한다.

단정함으로써 놓치고 잃는 것이 삶에는 너무나도 많다.


패배감이 들 때.

왠지 모르게 삶이 버거울 때.

지저분하게 얽힌 사람들과의 관계가 개운하지 않을 때.


불편한 마음을 모으고 모아, 나는 그 모든 것을 '보류'한다.

도망칠 수 없는 자에게 그것은, 꽤나 쓸모 있는 '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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