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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03. 2016

마흔이어도 괜찮아

그저 흔해져 버린 느낌 오늘 하루를 또렷이 하려는 노력

철이 없을 적엔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다.

어쩌면 하루라도 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른이 되면 뭔가 달라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상이 그러든, 아니면 내가 그러든.


모두가 그대로인걸 보니.

되긴 된 걸까?


어른이라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숫자와 역할"


살아가다 보면 익숙하지 않은 숫자와 역할이 다가오게 마련이다.


고3이라는 숫자와 수험생. 이유도 모른 채 공부 또 공부.

스무살이라는 대학 신입생. 청춘의 상징.

스물 초반의 군인. 인생의 전환기.

스물 후반의 직장인. 냉정한 세상과의 마주침.

그리고 누구나 민감한 서른. 서른이라는 이름 하나에 또다시 사춘기.


그리고 지금은 마흔. 

그저 흔해져 버린 느낌.


어쩌면 나에겐 다가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것들과의 조우.

결국은, 그것들과의 만남은 익숙하지 않은 채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고 만다.


죽도록 공부도 못해본 것 같고, 청춘은 뒤돌아보아 아름다울지언정 그 당시엔 청춘에 합당한 경험을 못했고, 군대에서 결심한 거대한 포부는 사회인이 되어 쪼그라들고, 세상의 흐름에 그저 맞춰 가느라 버겁다.


그리고 어느새 마흔.

무엇이 변했을까? 무엇을 해왔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맞이한 요즘의 느낌이, 지나간 그것들과 다르지 않다.

어쩌다 마흔, 누구에게나 흔한 이 나이를 그저 익숙하지 않은 채 흘려보낼 것이 뻔하다.


"이별과 익숙해지는 나이"


예전엔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민감도가 지금보다는 덜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가도 '이별'이라는 생각이 그리 크게 들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 '이별'은 사람은 물론, 어느 물건에 대한 것일 수도, 어느 장소나 나의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추상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무언가로부터의 '멀어짐'이 더 어울리는 단어일지 모른다.


단지, 중년에 샘솟는 어느 다른 호르몬의 작용 때문일까?


요즘은 생각한다.

스스로가 살아가고 있는 건지. 죽어가고 있는 건지.

마음을 젊게 먹고 활기차게 살아가지만, 사람은 언젠간 죽는다는 대전제 하에 다시금 생각이 많아진다.


주변 지인들의 부모님, 선배, 그리고 동료나 후배들마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불확실한 미래와 나의 시간보다 더 빨리 자라나는 아이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 내 맘대로 되는 것들보다는 되지 않은 것들과의 매일의 만남. 나의 꿈과 포부와의 멀어짐이 커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보다 하루 젊었던 어제 나와의 이별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도 젊음,
그래 나는 마흔이다!"


요즘 들어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식 나이 계산법의 논란이 반갑다.

잠깐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이 환경도 제법 위로가 된다. 마흔이 되려면 생일이 지나고도 1년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흔히들 말하는 0.8 인생도 한몫한다. 지금의 나이에 0.8을 곱해야 예전 시대의 나이 역할과 같다고.

8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과거 65세 (85 x 0.8)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과 같다는 연구 결과에 기초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벌써 마흔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피해갈 수 없다. 만 나이를 들이대고, 외국 나이를 적용하고 0.8을 곱하면서까지 어느 정도 시간을 벌기도 싫다. 그래 봤자 결국 조만간 또 마흔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숫자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사회적으로 그 나이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 나이에 걸맞지 않거나 남들과 다른 모습은 모두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게 된다. 그나마 요즘은 그러한 것이 덜하고, 예전 마흔과 지금의 마흔은 크게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흔이라는 이때에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이 싫지는 않다.

우리가 맞이했던 익숙하지 않은 그 상징적인 그 시절들은,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다 그 순간에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라는 신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의 쉼표.

그리고 젊음의 연속.




어색한 채, 익숙하지 않은 채 보내버렸던 그때를 생각하며 지금 마흔을 단디 준비해본다. '나는 마흔이다'를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여보자고.


어색하게 소중한 이때를 보내버리지 않기 위해.


불혹(不惑)이라는 나이지만, 나는 혹(惑)하는 게 많아 그것이 스스로 대견하다. 또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것도 그렇고,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 무엇보다 현재 나의 일을, 힘들어도 자랑스럽게 즐기고 있다는 것.


지나간 젊은 시간들이 흐릿했다면, 현재의 시간을 또렷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마흔이 되어서 더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생각한다.


그래 나는 마흔이다.

마흔이어도 괜찮아.


괜찮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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