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본질이 가져다주는 '본질'은 무엇인가.
이건 본질이 아니잖아!
2013년에 개봉한 영화 '톱스타'에서 배우 김수로(최광철 역)는 영화 전반에 걸쳐 '본질'을 외쳐댄다.
'이건 본질이 아니야'라는 말은 영화 중반에 웃음을 선사한다. 사실 '본질'이란 말은 그리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외침은 웃음을 유발하는데, 이는 융통성 없어 보이는 그의 언행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본질이 아니다'라는 말만 할 뿐, 그럼 무엇이 본질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 실체를 말하진 못한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관객들에게 무거운 화도로 회자된다.
영화의 기조 자체가 무명에서 유명으로 돌아선 한 배우의 성공과 추락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초심을 잃어가는 주인공에게 관객들조차 어서 '본질'을 돌아보라는 말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외침은 유머나 농담이 아니라, 초심을 잃어가는 주인공의 삐딱함을 더 극대화하기 위한 감독의 분명한 의도였다.
그러나 '본질' 속엔 아이러니함이 숨어 있다.
때로는 그것을 벗어나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김수로가 영화에서 본질을 운운하며 영화 촬영을 거부했을 때, 그 자체로 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간 상황이 발생했다. 주인공인 엄태웅이 무명에서 유명 배우가 되었을 때, 초심을 잃고 안하무인의 캐릭터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추락을 겪어야 했고, 그가 추구하던 본질이라는 궤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의 끝엔 다시금 초심을 잡고 본질이라는 궤도에 오르려 겸손하게 노력하는 부분은 본질의 벗어남이 일정의 깨달음과 삶의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본질은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 무엇이 본질인지를 잘 정의해야 한다. 더불어, 내가 정의한 그 본질에서 벗어나 봐야 본질이 보일 때가 있다.
내가 추구하는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이다.
스스로를 잘 알고 관찰하고 탐구해야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에 반하는 그 모든 것을 나는 거부한다. 그러나,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 본질에 반하는 많은 것들에 나는 동화되고 풍화된다. 내가 바라지 않는 사람이 했던 걸 해야 할 때도 있고, 자아를 잊은 채 먹고사는 것에 골몰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나와 동떨어진 어떠한 삶을 살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본질인 '나'를 떠올린다.
그리곤 글을 쓴다. 나 자신을 되찾고, 페르소나라는 가면 속에 숨어 버린 나를 어르고 달래기 위해서. 다시금 '본질'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나 방황한 나는,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지만 그 두 손엔 깨달음과 통찰이 가득하다.
이 또한 본질의 역설에 기인한다. 본질을 떠났을 때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그것에 힘입어 또 본질을 찾게 되니까 말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본질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나를 알아가는 건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나 자신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미지의 영역은 더욱더 커지고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 100% 나 자신을 이해한다고 하는 순간, 900%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엄습한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은 일종의 '추구'다.
그 '마무리'는 내 영역의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가치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 '본질'은 무엇인가.
그 본질이 가져다주는 '본질'은 무엇인가.
삶의 균형이 본질에 치우치면, 나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숙명을 받아들인다.
그 숙명 속엔 고됨과 아픔이 있겠지만, 내가 분명 확신하는 바는 방황의 끝에 다시 본질로 돌아올 땐 두 손에 본질에 관한 무언가가 가득 들려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본질이 주는 선물.
본질을 벗어난 고통.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삶이며, 삶은 그토록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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