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삶의 시작에 관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끝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스스로 정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산 자에게 매우 불편한 말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겐 매우 편한 말이다.
성공하면 죽고, 실패하면 다시 사는 아이러니.
누군가에겐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이 죽음보다 못할 수도 있다.
산 자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재단하지 말라.
스스로 삶의 줄을 놓은 자의 죽음을 논하지 말라.
어차피 죽어가는 존재가 다른 이의 선택을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
우리가 한 시도 쉬지 않고 숨을 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인가?
내가 여기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자각이다. 생각함으로써 고로 존재하는 자는 숨을 쉬어야 한다. 존재를 인식한 존재는 그제야 안도한다.
그러나 숨을 쉬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만이 존재함의 전부일까?
숨을 쉬어도, 생각을 하여도 존재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니, 존재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큰일이다.
지상 최대의 과제가 떨어졌다. 나는 나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가슴 떨리는 일을 찾는다.
누군가는 사랑을 찾아 헤맨다.
누군가는 돈으로 무언가를 치환한다.
누군가는 미치도록 읽거나 또 미치도록 쓴다.
누군가는 스스로를 죽인다.
이 모든 것이 향하는 지향점은 모두 같다.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발버둥이다.
자, 이제 알겠는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특별할 건 없다. 가슴 떨리는 일을 찾는 것처럼, 사랑을 하는 것처럼, 돈으로 무엇을 치환하고 미치도록 읽거나 쓰는 것처럼.
존재하기 위한 발버둥일 뿐이다.
무언가로 내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처절한 사투다.
죽음으로써까지 저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은 것이다.
존재를 입증해내는 저마다의 방법에 대해 논하지 말라.
저마다의 선택은 각자에게 최선이고, 저마다의 결과는 각자의 책임임을 생각하라.
자, 이제.
내 존재를 스스로 점검할 시간이다.
거창한 것을 떠올리지 마라.
인생은 짧고, 경험은 불확실하며, 결정은 어렵다.
그러나 당신.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숨 쉬고 있었다는 건 기억이나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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