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隻) 지다'란 말이 있다.
서로 원한을 품어 미워하거나 대립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척'이란 한자는 '외짝'을 이른다. '외짝'이라니. '서로 미워하여 등을 지는 사이'와 '외짝'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원을 가로질러 올라가 보면, '척'이란 글자는 옛 조선 시대의 '피고(被告)'를 이르는 말이다.
피고가 있으면 '원고(原告)'가 있다. 그러니까, '원고'쪽에서 보면 한 쌍의 외짝은 '피고'가 되는 것이다. '피고'가 '외짝'을 뜻하는 한자 '척(隻)'의 의미와 부합하여 만들어낸 결과다.
민사에서 '원고'와 '피고'는 평소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분쟁이나 갈등은 결국,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과연 그렇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저 멀리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 옆의 동료나 가족이다.
'척'이란 말 말고도, 그 뒤에 붙는 '지다'란 말에도 주목을 해야 한다.
'지다'의 원뜻은 '어떤 좋지 않은 관계가 되다'란 뜻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짐을 짊어진다는 '지다'의 뜻도 가미한다. 가까웠던 사람과 관계가 어그러지면 그것은 내가 이고 가야 할 삶의 짐이기 때문이다. 관계가 단절되고,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다 보면 삶은 극도로 피로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 관계를 어거지로 이어 붙이지 않는다.
깨진 그릇은 이어 붙일 수도 없을뿐더러, 붙였다 하더라도 그릇으로 사용할 순 없다. 피로는 언젠간 풀린다. 깨진 그릇을 붙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오히려 더 큰 피로다.
대신, 나는 '원고'의 입장에서 벗어나 '판사'가 되어보기로 한다.
척을 진 이유의 모든 것이 상대방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나를 탈피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과연 내 행동과 반응도 그리 온당치는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심지어는, 내가 '원고'가 아니라 '피고'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상대에게 나는 '피고'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척을 진 내 원수들에게 할 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신기하게도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는, 예전에는 말도 안 되던 감정마저 피어오른다. 그들로 인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상처받았던 마음과 혹독하게도 아팠던 영혼이 나로 하여금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라고 말한 것이다.
더불어, 척을 진 원수들 덕분에 나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가지 말아야 할 곳에 내 원수들을 심어놓은 누군가의 큰 그림이 아니었나 싶다. 가지 말란 길로 자꾸 가는 나에게, 그 방향을 어서 틀라는 누군가의 신묘한 장난이라고나 할까. 내 원수들 덕분에 나는 진로를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 덕분에 더 소중한 사람을 알아보게 되었다.
척을 지거나, 적이 되거나,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실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게 '정화(淨化)'의 과정이었다. 걸러질 것은 걸러지고, 소중한 사람들만이 남는 것을 목도한 것이다. 내게 남은 사람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애써 구별할 필요가 없어졌다.
살아가면서 척을 지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척지는 일은 내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 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원수들이 양산된다는 말이다.
그게 삶이다.
살아가는 동안 원수가 생기지 않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다간, 자기 자신과 척질지도 모를 일이다.
소란한 마음을 잠재울 때마다 나는 내 원수들에게 마음의 편지를 적어 보내기로 한다.
'때문에'란 말보단 '덕분에'란 말을 가득 채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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