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그 경계의 면을 즐기는 사람.
'줄타기'는 대한민국 무형문화재다.
놀이마당에서 줄광대가 공중에 맨 줄 위에서 삼현육각의 연주에 맞추어 어릿광대와 함께 재담과 춤, 소리, 발림을 섞어가며 갖가지 기예를 벌인다. 이는 한국에만 있는 놀이가 아니다. 서커스에도 외줄 타기는 단골 메뉴다.
모습만 다를 뿐, 외 줄에 몸을 맡긴 그 모습은 나라와 문화를 막론하고 동일한 모양새다.
'놀이마당'과 '서커스'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한 사람 또는 여러 명이 오가며 벌이는 이 모습에 사람들은 마음을 졸이고, 그 아슬아슬함을 회피하듯 즐긴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이 마음의 요동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눈을 가리면서도 보는 사람도 돈을 내었고, 손에 땀을 쥐도록 긴장하는 사람도 돈을 내었다. 보고 싶지 않지만 끝내 보고 싶은 이러한 마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줄타기를 보며 삶을 떠올린다.
삶이 줄타기의 연속 그 자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에는 아슬아슬함이 있고, 한시라도 졸이지 않는 마음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살만하면 힘들어지고, 힘들어 죽겠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살만한 구석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농담 같다.
그리고 그 농담은 '줄타기'를 닮았다.
'줄'이 주는 아슬아슬 함은 '외줄'에 기인한다.
외줄 위를 걸으려면 고도의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잘 안다. 직접 해본 경험으로서도 알고, 인식적인 측면에서도 그것을 인지한다. 거기에다가 그 위에서 놀리는 재간들은 가뜩이나 긴장된 사람들을 더 경직시킨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아침이다.
그러면 하루는 이미 시작된다. 그리고 나에겐 '외줄'이 배달되어 있다. 나는 오늘도 그 외줄에 올라야 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외줄의 시작과 끝으로 이어져있다.
하루하루가 불안함과 두려움 투성이다.
조마조마한 외줄 위에 발을 올리니 당연한 감정이다. 한 번이라도 미끄러지면 걷잡을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야 한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다치면 어떡하지', '잘못되면 어떡하지'란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나, 줄타기의 매력은 명확하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균형은 가만히 서서도 잡을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굳건해진다. 자전거를 생각해보면 쉽니다. 두 바퀴로 그냥 서 있는 자전거에 의미가 없고, 앞으로 나아가야 균형을 이루어낼 수 있듯이. 줄타기도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슬아슬함과 조마조마함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하나 둘 사라진다.
그러하므로 오늘 하루라는 외줄을 마침내 잘 건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어김없이, 다음의 하루엔 외줄이 하루의 시작과 함께 배달된다는 것이다.
외줄에 익숙해지면 그 두려움은 놀이로 변한다.
누군가는 그것에 돈을 지불할 정도의 볼거리가 된다.
그렇다면 나에게 삶이라는 줄타기는 두려움인가 놀이인가.
익숙하지만 두려움일 때가 있고, 두렵지만 그것을 즐길 때가 분명 있다.
삶은 줄타기이고, 그 본질이 '균형 맞추기'라고 한다면.
삶의 진정한 승자는 그 둘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을 갖되 즐길 줄 알고, 즐길 줄 알되 두려움을 떠올릴 수 있는. 자만과 겸손, 우쭐함과 쪼그라듬, 밝음과 어두움.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그 경계의 면을 즐기는 사람.
그렇게 나는 오늘도 양팔을 벌려 나에게 주어진 외줄에 발을 올린다.
경계의 면에서 즐길 준비를 한다.
삶은 줄타기의 연속이니까.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줄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