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잘 아는 사람은 잘 될 수밖에 없으니.
심리학을 선택한 이유
나는 어릴 적 꿈이 없었다.
여기 말하는'꿈'이란 장래희망을 넘어선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절절한 고찰이었다. 그때는 초등학생 때였다. 아니, 초등학생 때부터 이러한 고민을 시작했다고? 사실이다. 이 말을 들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특별하게 볼 것이다. 호르몬 분비가 빨라 조숙하거나, 특별한 구석이 있어 남다르게 성숙했거나 하는 식으로. 나는 누구보다 평범했다. 그러나 나에겐 '특별한 상황'이 있었을 뿐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가세가 기울었고, 사모님 소리를 듣던 어머니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돈을 벌러 나가셨고, 사춘기 누나는 밖으로 나돌며 방황하기 일쑤였다.
그때는 휴대폰도, 인터넷도, PC방도 없었다.
휴대폰과 인터넷도 없으니 '정보'도 전무했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초등학생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생각' 밖에 없던 환경이었다. 나는 늘 스스로와 대화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다른 집과 그때의 내 상황은 무척이나 다르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어른의 개입이 없으니, 내 생각엔 레퍼런스가 없었고 쭉쭉 뻗어나가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생각의 방향은 나 자신에게로 향했다.
나는 내가 궁금했다.
존재의 이유를 본능적으로 떠올렸다.
이러한 생각과 마음은 성장 과정에도 늘 함께였다.
무엇이 되겠다는 장래희망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짙어졌다.
그것은 바로 '심리학'이었다.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준
심리학의 힘
대학교에서 심리학 전공을 하며 나는 스스로를 더 많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심리학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갈증이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며, 관련 서적을 읽으며 나는 자신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물론, 책과 강의에서 얻은 그것들은 그저 지식일 뿐이었다. 그것을 소화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중요한 건, 심리학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다든가,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조종하는 것이 심리학의 전부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매우 편협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거시적'이란 뜻은 무엇일까?
'무의식', '지각(知覺)', '인지(認知)', '광고', '소비', '범죄', '사회', '학습' 심리 등. 심리학엔 다양한 분야가 있다. 처음 이것을 배울 땐, 내가 의대생도 아닌데 왜 뇌와 눈의 구조를 배워야 하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더 흥미로운데, 왜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가며 자꾸 무언가를 증명해내려 하지? 란 의문이 가득했다.
'왜'를 물었다.
다시, 내가 이것들을 왜 배우는지를 자문했다. 그러니 보였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연구였고, '사람'인 나는 그 심리 법칙 안과 밖에 모두 걸쳐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즉,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그것을 내 삶에 투영하고 적용하여 보니 큰 의미가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매우 내성적이었다.
초등학교 땐 사람들과 눈 마주치기가 어렵고 두려워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땅만 보며 걸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미래를 향한 포부와 비전 그리고 자존감의 결여로 이어졌다. 교복을 입기 시작했을 때, 넥타이 매는 법을 몰라 친구에게 배웠던 기억도 나고, 돈이 없어 그토록 원하던 단기 어학연수 한번 못 갔던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나 심리학을 공부하여 깨달은 '(거시적) 심리 체계'를 '나'에게 적용하기로 했을 때,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성격은 단점이 아니라 차분하고 묵직한 나만의 무기가 되었고, 그것을 넘어 여기저기서 리더의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학교 성적은 수직으로 올라 학기 내내 장학금을 거머쥐었다. 교수님에게 당당하게 성적 이의를 제기하고 더 높은 점수를 따낸 적도 있었다. 자존감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는 여러 공모전에 입상하였고, 해외 연수부터 장학금 그리고 수많은 경품까지. 대학생으로선 생각하기 어려운 액수를 벌어들이기까지 했다.
나는 이 변화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힘'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즉, '마음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세상 탓, 아버지 부재 탓으로 일상을 머뭇거렸다면, 내가 '지각'하고 '인지'하고 '반응'하는 것들을 돌아보고 '활용'함으로써 일상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거시적'이란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에 있었다.
또 한 번의 큰 성장,
'메타인지 글쓰기'
삶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승승장구하던 대학생 시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고, 먹고살기에 영혼을 걸어야 하는 직장인이 되자 수많은 도전과 피로가 몰려왔다.
물론, 감사할 것들 투성이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를 했고, 어학연수 한 번 가보지 못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해외 마케팅부서로 옮길 수 있었고, 더더욱 원하던 해외 주재원을 두 번째 하고 있으니. (나중에 메타인지 글쓰기와 함께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이들 모두는 어린 시절에 'Wish Note'에 적어 놓았던 것들이다. 적어 놓은 대부분의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직장인의 삶은 고달프다.
번아웃이 왔다. 무작정 뛰며 무언가를 이루었지만, 자아를 분실한 존재의 아픔은 날카로웠다. 살고 싶었다. 숨을 쉬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배워본 적도 없고, 써 본 적도 없고, 꾸준하게 일기조차 써 본 적 없는 내가. 그런 내가 글을 쓴다니. 평범한 직장인이 글을 쓴다고 한들, 무언가 바뀌기라도 할까?
그 결과는 어떨까?
나는 지금도 글로 숨을 쉬고 있다. 내어 놓인 글들이 모여 세계관을 만들었고, 투고 한번 하지 않았지만 출판사 선 제안으로 지금까지 8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대부분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세종 도서 교양 부문에 선정된 책도 있으며 이 외에 수많은 강의와 멘토 활동으로 새로운 경제적 파이프 라인이 형성되었다. 그 수익금은 연봉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솔직히, 나조차 믿기지가 않는다.
써 본 적도 없는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돌아봤다.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게 된 것인지를.
그것을 되짚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어릴 때의 나를 만났다.
심리학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던 나를 만났다. 즉,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고, '글쓰기'는 스스로를 돌아보는데 아주 훌륭한 수단이자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을 써 내려갔다.
나는 이것을 '메타인지 글쓰기'라 부른다.
'메타인지 글쓰기'는 내가 심리학을 통해 깨달은 삶의 의미를 한층 더 빛나게 해 주었다.
삶의 비밀을, 세상을 살아가는 스킬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
심리학은 '지각-인지-반응-활용'의 단계를 내게 알려주었다.
더 나아가 메타인지 글쓰기는 '분석-해석-대응-발전과 성장'의 과정을 가능케 했다.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미리 분석하는 능력, 인지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상황을 해석하는 능력,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능력. 마지막으로 이러한 것들을 잘 활용하여 나를 발전시키고 성장케 하는 능력까지.
'메타인지'의 '메타-'는 '뛰어넘는다'란 접두어다.
그리하여 '메타인지'는 '상위 인지' 또는 '인식에 대한 인식'이란 개념을 뜻한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을 가늠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아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더 고차원적인 지식이라 할 수 있다.
글쓰기는 '메타인지'를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내 '페르소나'를 나열하고 세분화하며 '소재'를 찾아갈 때, 우리는 스스로를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거시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맥락'을 내포한다는 말이다. 맥락이 파악되면 우리는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생각해온 것과는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불어, 글을 써 내려가는 과정에서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되고, 또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생각과 표현을 마주함으로써 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제대로 쌓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메타인지 글쓰기'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자, '메타인지 글쓰기'를 시작하고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심리학'을 파고들며 나는 '마음의 눈'을 떴다.
'메타인지 글쓰기'를 하며 나는 '자아의 눈'을 떴다.
이 두 번의 성장은, 삶이 내게 준 선물이다.
나는 언제나 삶을 혐오하고 증오해왔다. 남보다 부족하게 그리고 늦게 출발한 핸디캡은 그 증오를 내내 합리화해왔다. 그러나, 그 합리화를 메타인지하여 한 걸음 떨어져 바라봤을 때 그것은 나를 옥죄는 스스로의 감옥임을 깨닫게 되었다.
'메타인지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는 점점 더 잘 되고 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 마음과 영혼에 숨을 불어주고 있다.
덕분에, 소명도 생겼다.
이렇게 좋은 걸, 알려야겠다는 생각. 그리하여 한 분이라도 '메타인지 글쓰기'를 시작하실 수 있도록 많은 시간을 글쓰기 연구와 프로젝트에 쏟고 있다.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소명은 그렇게 이기적인 것이다. 나를 이롭게 한 것이 그 바탕이니. 분명한 '소명'은 사람을 신명 나게 한다.
다음은 내게 또 어떤 성장이 올 것인가.
나는 너무 기대다 된다. 하루하루가 절망이었던 삶이, 이제는 선물 꾸러미를 풀어보는 설렘으로 변하고 있다.
'메타인지 글쓰기'를 지속하는 한, 나에겐 이러한 선물이 하나 둘 더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잘 될 수밖에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