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그저 우리네 삶에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배가 고팠다.
무어라도 먹으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무엇을 먹었다.
한 술 뜨자 행복감이 몰려왔다. 하얀 쌀밥에, 얹힌 김치와 고기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행복에 취해 먹은 음식은 배를 부르게 했다.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더부룩함이 몰려왔다. 행복감은 사라졌다. 오히려, 속이 비워져야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밥을 먹은 게 잘못일까?
아니, 애초에 배가 고픈 게 잘못이었을까?
적당히 먹었어야 했던 게 가장 큰 숙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는 행복의 임계점과는 거리가 멀다. 덜 먹었다면, 채워지기도 전에 숟가락을 놨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더부룩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면, 숟가락을 일찍 놓으며 행복감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워진 속은 어느새 다른 무언가를 갈구하며, 행복보다는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위해 발버둥 칠 것이 분명하다.
더하는 것이 행복일까?
덜한 것이 행복일까?
삶은 참으로 어렵다.
쉽지 않게 꼬아놓았다.
더하고, 덜하며 행복은 들쑥날쑥한다.
들쑥날쑥하는 사이 삶은 기쁘기도 하고 고단하기도 하다.
누구의 설계인지는 모르지만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야속하다고만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당장 우리는, 오늘과 지금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더해서 행복해지는 것과, 덜 해서 행복해지는 것.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는 왜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불행하지 않으려 행복하려 하는 것일까.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니 행복해지려 하는 것일까.
행복은 주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지 않다.
행복은 상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이지 않다.
그것의 정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도 같다.
행복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중첩이다.
그러니까, 더하는 것과 덜 하는 것 사이 행복은 중첩으로 혼재되어 있다.
다만 행복은 내가 느끼는 그 순간에만 있는 것이다.
붙잡으려 하지 않고, 그것에 미련을 가지지 않을 때.
행복의 거리는 더 가까워진다.
무엇을 더 할 필요도.
무엇을 덜 할 필요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행복의 조건은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느끼고 놓아주는 것이다.
더하고 덜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란 말이다.
행복은 그저 우리네 삶에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