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에 대한 반박

생각하므로 존재하는가. 존재하기에 생각하는가.

by 스테르담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이 말을 곱씹으며 살아왔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느낀다. 숨 쉬되, 생각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존재를 가늠할 수 없다. 가늠할 수 없는 존재는 그 존재 자체의 유무를 의심당한다. 존재에 대한 의심은 가혹하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이 드는 것 자체를 생각이라 할 수 있고, 다시 이 생각은 존재의 '유(有)'를 증명한다. 데카르트의 논리에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고 회의하는 건, 생각함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의 강력한 방증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어느샌가 그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용인한 합리적 여지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일관되게 자신의 생각이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 동시대에 갈릴레오가 교황청에서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또 하나.

그의 책은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철학서였다. 당시 학술서적은 스콜라의 말인 라틴어로 쓰는 것이 관례였다. 이 기념비적 의미에 대해 데카르트는 "옛사람의 서적만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도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대체로 단순한 분별만을 적용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의견을 바르게 판단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즉, 그의 책은 기성의 권위를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머리로써 사물을 생각하고 철학하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썼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의 말을 토대로 나는 생각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 또한 나에겐 '옛사람'이니까.


데카르트에게 던지는 질문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명제에 흠을 내고 나는 그것을 헤집기로 한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나는 존재를 확인한다.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과 느낌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까진 데카르트 그의 말이 맞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한 가지가 있다. 이것은 너도나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현인이나 철학자나. 이 시대를 사는 사람 누구나 놓치고 있는 것.


어디에서 왔는가.

왜 태어났는가.

한마디로,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추측을 근거로 삼기 위해 수많은 도전과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철학과 종교라는 어느 하나의 분류적인 용어만 만들었을 뿐 여전히 미궁에 싸여 있다.


데카르트는 이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무책임하게 축약시켜 놓은 것이다.

데카르트를 만나면 묻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왜 존재해야 하는데요? 아니, 왜 생각해야 하는데요?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생각'과 '존재'의 인과관계로 풀어냈나요? 자, '생각'은 좀 나중에 이야기하고 데카르트 당신은 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저 나는, 그의 대답.

아니, 변명이 듣고 싶다.


존재하기에 생각한다.


그 의심은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생각'이란 말로 우리의 사리분별을 흩트렸다. 연막작전이다. 생각하는 존재에게 '생각'이란 말을 앞세우니,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존재의 이유이자 증거인 것으로 귀결된다. 재밌는 건, 그 이후에 우리는 더 이상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다. 그러나 삶의 묘미는 역설에 있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사치다.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에게 생각은 가당치도 않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로 바뀌어야 마땅하다.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의 다름 아닌 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각을 조작하여 존재의 이상을 망상으로 바꾸고, 그 망상을 환영으로 만든다고 해도. 설령, 치매 걸린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몸뚱이를 움직이는 무형의 '존재'라는 아우라는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존재'의 이유와, 그 탄생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가 추측하는 것은 철학과 논리 그리고 논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반박하려는 의도보다는, 존재의 존재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를 기억하는가. 삶의 부조리는 우리의 '반항'으로 대적할 수 있다.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하지 않는 말 없는 죽은 자들. 그들을 나는 애도하기보단 원망한다. 아, 죽음보다 삶에 대한 원망이 나는 더 크다. 삶을 시작하게 만든 존재에게 그 원망의 손가락질은 더 강렬해야 한다.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때.

그것을 명확하게 풀어내지 못할 때. 우리는 데카르트의 말을 답을 모르는 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한 한 방편으로 활용한다. '생각'은 '존재'의 이유가 아니다. 근원적인 힘도 아니다. 그저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의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이러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지만, 그 선택이 가장 최선이라고 믿진 말아야 한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 존재가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가. 답 없는 질문은 존재의 삶을 더 어둡게만 할 뿐이다.


태어난 자는 영문을 모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질문을 달리 하려 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좀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인가.


이것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다.

존재라는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던져진 주사위는 나를 생각하게 한다. 생각하는 나는 존재를 인식한다. 존재에 대한 인식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답 없는 쳇바퀴를 돌 수도, 쳇바퀴를 벗어나 또 다른 미지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다.


'생각'이란 건 그리하여 우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아니, '존재' 그 자체가 나는 의심스럽다.


이런.

다시 원점이다.


생각하므로 존재하는가.

존재하기에 생각하는가.


자신의 꼬리를 보고 놀라 그것을 잡으려 뱅글뱅글 돌고 있는 저 개가, 왠지 나와 다르지 않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더해서 행복해지는 것과 덜해서 행복해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