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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18. 2024

운전대를 잡은 모두는 조급하다.

<스테르담 운전대로부터의 사색>

무척이나 어려서 나이도 기억이 나지 않을 때였다.

아마도 대여섯 살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브라운관 TV에 나오는 만화는 디즈니였다. 당시 어린아이들에게 디즈니는 꿈의 프로그램이었다. TV에 디즈니 캐릭터가 나오면, 바짝 자세를 바로 고치고 그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흐트러짐 없이 만화를 완주했다. 아마도 그땐, 그 시절의 뽀로로가 디즈니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어린 나이였고, 운전을 모르던 나이. 어느 한 캐릭터가 차에 올라타기 전 아주 상냥하고 로맨틱한 면모를 뽐냈다. 꽃 향기를 막고,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끝은? 그림에서 보듯, 그는 괴물로 변하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도 이와 같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러한 속성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이것이 우리네 본성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지금의 나도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운전을 하며 나는 기분이 많이 상하고 욕을 하거나 흥분과 분노를 표출하는 상황을 많이 맞이한다.


이 모든 건 조급함에서 온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왜 없을까? 사실, 자동차는 문명의 이기다. 말 그대로 이로운 기계라는 뜻이다. 자동차의 근본 목적은 '효율성'에 있다. 빨리, 편하게 가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 목적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화낼 필요가 없다. 자동차는 걷는 것보다 빠르고, 뛰는 것보다 편하다.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화낼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건 남들과의 비교다.

저 차가 나보다 빨리 가고, 저 차 때문에 내 앞길이 막힌다는 생각은 결국 조급함을 자아낸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각 개인이, 타인이 자동차라고 비유해 본다면 삶은 결국 도로 위에서 만나는 자동차들과의 아웅다웅함이다. 


'운명(運命)'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목숨을 운전한단 뜻이다. 운전할 때의 '운'자도 같은 말이다. 우리 모두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운전하느냐에 따라 우리 명줄이 오간다. 내 운명은,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운전하여 이루어가는 것이다.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기로 한다.

손해 운전을 하기로 한다. 손실로 인한 상처보다는, 피해는 보지 않되 아예 처음부터 손해 보자는 마음으로 운전을 해야지. 그러자 삶과 운전이 덜 조급해진다. 조급해져서 피해를 보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피해보다는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 손해보지 않으려 발버둥 치려다 더 많은 걸 잃고 나서야 나는 이것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운전대를 쥐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명'을 '운전'하고 있다.

운전하는 모든 존재는 조급하다.

이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려야, 덜 조급할 수 있다.

그래야 안전 운전, 방어 운전을 할 수 있다.


잊지 말자.

궁극적인 운전의 목적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안전하게 도달하는 것이다.


운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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