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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28. 2023

내가 직접 쓰는 몇 안 되는 페르소나, '작가'

글을 '쓰고',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쓴다'.

페르소나란
사회적 가면의 강제성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 백, 수천 개의 페르소나를 쓰고 있다.

사회적 역할을 이르는 페르소나, 그러니까 '사회적 가면'은 자의성보단 타의성이 많다. 예를 들어, 삶의 시작부터가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아가'나 '자녀'란 가면은 내 의사에 상관없이 써진다. 이후엔 학생, 어른, 친구, 조카, 직장인, 남편, 아내, 부모, 이웃, 지나가는 사람 등. 어느 하나 내가 쓰고 싶어 쓴 것이 없다. 


이쯤 되면 타의성을 넘어 강제성이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이란 건 이처럼 내가 '써야 하는' 사회적 가면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사회생활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 가면에 맞추어 우리는 여러 겹의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행동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와 충돌하게 된다. 내가 아닌 것 같은, 내가 하기 싫은, 나와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은 사회적 가면에 맞추어 (사회 부적응자가 되지 않으려면) 해내야 하는 이데올리기가 된다.


이데올리기는 각 개인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통념이자 사상이다.

자녀이니까 이래야 하고 남자이니까, 여자이니까, 젊으니까, 나이 들었으니까 저래야 한다는 암묵적 압력은 어느새 폭력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다. 누구 하나 때린 사람은 없어도, 우리 마음속엔 누구나 큰 멍울 한 두 개 이상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페르소나란 사회적 가면의 강제성이다.


내가 직접 쓰는
페르소나는 없을까?


자, 이제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살아오면서 내가 직접 쓴 페르소나는 무엇일까?


내가 '쓴 것'과 나도 모르게 '쓰인 것'은 매우 다르다.

내 질문에 이르러,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는 이제껏 내가 쓴 페르소나보다, 써야만 해서 썼던 페르소나가 90% 이상이란 걸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자발적이기보단, 타의에 의해 살고 있다는 뜻이다. 하고 싶은 일보단, 해야 하는 해내야만 하는 일을 하며 숨을 쉬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나는 이 '타의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삶은 너무나도 아이러니해서, 사람은 '타의성'으로부터 학습하고 그 학습을 토대로 '자의성'을 발견해 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세심한 타의적 보살핌을 받지 않으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인간이다.


그러나, 타의적 삶은 고단하다.

가장 큰 문제는 그 고단함 속에서 '자아'를 잃는다는 것이다. 수 백  겹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가면아래에서 '자아'는 쪼그라들고, 무언가 나를 위해서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돌아보니 공허함만이 가득하다. 그 공허함엔, 심지어 '나'라는 존재조차 없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고,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성장의 과정에선 '타의성'에 기대야 한다.

그래야 학습할 수 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

'자발성'과 '주체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쓰이는 페르소나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페르소나를 써야 하는 이유다.


가면을 쓰다,
글을 쓰다.


그러한 면에서 '쓰다'라는 중의적 표현을 생각해내야 한다.

스스로 선택한 가면을 써야 한다는 다짐을 했을 때, 그 마음은 비장했으나 나를 더 슬프게 만든 건 대체 내가 쓰고 싶은 가면이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남이, 사회가, 세상이 부여해 주는 가면만 쓸 줄 알았지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그리고 무얼 잘하는지 도통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면을 쓰기 전에, 글을 먼저 쓴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희미해진 나를 조금씩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인디언이 말을 달리다 걸음 느린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도록 잠시 멈추는 것과 같이, 나는 글을 쓰며 저기에 위처진 나를 기다렸다. 마침내, 내가 나와 마주했을 때 나는 마음과 영혼으로 울었다. 진정 사랑해야 할 존재를 내팽개치고,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를 열심을 사는 내내 소진해 왔기 때문이다.


글을 쓰자 쓰고 싶은 가면이 생겼다.

내 안의 것들을 토해내자, 토해낸 것들에 선명한 내가 있었다.


스스로를 선명하게 들여보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보였다.

또한, 무어라도 꾸준히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꾸준하지 못하고, 목표만 높게 잡고 쓰러지기를 반복하던 나를 이제 더 이상 자책하지 않게 되었다. 자책하기보단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작가라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니까 작가다.
글을 쓰고,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쓴다.


다시, 중의적 표현으로 이 말을 해석해 보자.

'쓰니까 작가다!'란 말을 나는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글을 쓰니, 작가라는 가면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참 묘하다. 참 매력적이다. '쓰다'라는 말엔 이처럼 재미난 요소가 있다. 


쓰면 쓸수록 삶은 더 흥미로워진다.

초라하던 내가 대단한 자아로 거듭나고, 타인에 대한 미미했던 영향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 과정은 글쓰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억지로 무엇을 했다는 느낌보단, 자연스럽게 이젠 때가 된 것과 같이 수많은 기회가 내게 몰려왔다.


덕분에, '작가'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 정체성을 많은 분께 전하고 있다.

나만이 작가가 아니라, 여러분도 작가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이젠, 함께 쓰는 사람들도 주위에 여럿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도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선택한 페르소나를 쓰니, 소중한 사람들이 주위에 가득해지는 선물을 받게 된다.




만약, 어떤 페르소나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우선 글 쓰는 걸 추천한다.


더 이상 주어지는 가면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가면을 쓰고 싶다면 글쓰기만큼 그것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도 없다.

사실, 그 힌트는 나 자신에게서 오는 것인데 열심히 살다 보니 오히려 잃어버린 나 자신을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이다. 쓰면 된다. 글 안에 내가 있다. 글을 쓰는 건 나 자신이다. 자아가 선명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 이제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쓰자.

그 '페르소나'를 썼다면, 글을 쓰자.


글을 씀으로써.

그 가면을 스스로 씀으로써.


우리는 이제 삶을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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