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 오감을 넘어 육감과 함께.
우리 신체는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대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오감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시각'은 획득하는 정보의 80%를 담당한다. 안구를 통해 들어온 신호는 뇌로 전달되어 해석되고, 뇌는 다시 호르몬과 신호를 발생시켜 온 감각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전달한다.
이 모든 건 생존을 위한 메커니즘이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눈은 밖을 본다. 즉, 우리 몸의 외부를 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은 우리 안을 보지 못한다. 겉모습조차도 거울이 아니면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들여다볼 수가 있는가?
혹자는 물을 수 있다.
그걸 꼭 봐야 하나라고 말이다. 나는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정보획득의 80%를 담당하는 게 시각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스스로를, 그 마음을 들여다 '봐야'하는 것이다.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이전보다 더 많이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다른 감각으론 그것을 확연히 알기가 쉽지 않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내가 모르는 모습을 볼 때의 낯섦과 당황스러움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의 20%만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때론 느낌이나 기분, 감정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모든 건 '결과물'이다. 내가 이미 어떤 자극에 의해 산출해 낸 반응. 이미 어쩔 수 없는 결과물을 들고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더군다나 그것들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하다못해 날씨에 따라서도 급변하는 그것들을 두고 우리 자신을 규명할 수 있을까?
과연, 마음을 들여다 '보는' 식스센스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찾았다.
오감에 하나를 더 얹은 그 무언가를.
나는 그것을 '글쓰기'라 말한다.
글은 기록이다. 활자로 내 생각과 감정이 남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한번 기록된 활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때의 감정과 생각을 잡아둘 수 있다. 그것을 읽는 것은, 그때의 마음을 '보는'것과 다름없다. 자,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식스센스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그로 인해 80%를 한 번에 나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는 건 아니다.
보긴 보지만 그것은 직접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고, 또한 마음의 그것을 시각화하기엔 활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언어는 생각의 감옥 아니던가. 생각할 수 있고, 마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더 많지만 언어는 그것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계속해서 쓴다.
글이 많아지면, 그만큼 내 마음의 단서도 많아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이 쏟아내면. 80%까지는 아니더라도 1% ~ 79%의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나는 확실히 이것을 느낀다. 글쓰기 전과 이후의 나를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외부로 향해 있는 촉각을, 내부로 향할 줄 아는 방법을 이제야 알았다.
밖에 있는 것들만 조심하려다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우를 이미 범할 만큼 범했다.
이젠 가능한 많은 촉각을.
시선을, 나에게로 향해야지 마음먹는다.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다.
오감을 엮어, 육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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