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무질서에 갇히지 않는 삶을 위하여
삶의 부조리는 개인의 욕구와 사회 현실의 불일치에서 온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이 세상은 각 개인 욕구의 합 또는 그 이상이며, 그 욕구를 바탕으로 성장하고 발전해 왔다. 그러나 고도화될수록 사회는 개인의 욕구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욕구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라 무질서한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들은 각자의 개인 욕구가 타인의 인권이나 안위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들을 하나 둘 늘려간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에 가지고 있는 '성문법'과 '불문법'이다. 여기에 '관습법'과 '판례법'이 추가되며 개인과 사회 간의 불일치, 즉 부조리는 더 커지게 된다.
무질서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의 내달음이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질서를 깨고 싶어 하는 욕구를 양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해변가에서 아랍인에게 총 다섯 발을 쏜다. 재판 과정에서 살해의 이유를 묻자 그는 '햇빛이 눈부셔서 그랬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유리한 판결을 받고 풀려날 수 있던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했다. 아니, 어쩌면 그 자신도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마침 눈부셨던 그 순간이 너무도 강렬하여 에둘러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뫼르소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 삶의 부조리를 줄이는 것이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삶에 대항한 것이다.
그리하여 뫼르소는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라는 문단의 칭송 아닌 칭송을 받는다.
나 역시 삶의 부조리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이 부조리 안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게 영 마뜩지 않다. 절대자의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다. 이럴 거면 왜 나를 존재하게 했는지를 따져 묻고 싶다. 부조리가 없다면 삶은 좀 더 영위로울 것이며, 영위롭게 살아가는 존재에게 삶은 축복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르는 일들을 마주하고, 그 안에서 풍화하고 초라해지는 자신을 수용하는 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유라도 알면 모를까, 삶은 그러하므로 혹독한 것이다.
나는 뫼르소가 말한 살해의 이유를 100% 이상 이해한다.
삶의 이유도 규명이 되지 않았는데, 내 삶의 모든 행동과 욕구의 이유를 굳이 문장화해야 할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삶에는 삶이다.
삶의 부질없음과 어처구니없는 농담의 기조에, 뫼르소는 있는 그대로의 영문을 재치 있게 설명한 것일 뿐.
나는 그의 죄를 이제라도 사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삶에 대항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뒤통수를 처 맞기도 하고, 거대한 풍파를 마주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제법 삶에 대항하는 방법들을 하나 둘 알아내고 있다.
첫째.
그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예전의 삶은 삶의 농담과 장난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생겨나는지, 왜 삶은 이리도 불공평한 것인지를 허공에 삿대질을 해가며 술 취한 사람처럼 자지러졌다. 그러해봐야, 힘 빠지는 건 나였다는 깨달은 후 나는 더 이상 허공에 삿대질을 하지 않는다.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지, 이러한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거야....라는 주체적 자포자기를 지향한다. 신기하게도, 받아들이니 떨쳐버릴 수 있다는 소소하면서도 확실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싸움은 대립에서 오지만, 어느 하나가 대립하지 않고 수용하면 그 싸움은 더 이어지지 않는다. 자뭇, 당황해하는 삶의 꼬락서니를 보더라도 그것은 통쾌한 내 선택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무엇이든 나는 받아들이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둘째.
'질문하는 것'이다. 삶은 나에게 수많은 선택의 기로를 강압한다. 대게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질문들이다. A를 선택해야 하나, B의 길로 가야 하나라는 혹독한 질문 세계는 단순하지가 않고 복합적으로 인정사정없이 들어찬다. 더 기가 찬 건,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후회'란 감정은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그걸 선택했더라면...'이란 후회로 점철될 때, 어느 모퉁이에서 그러한 나를 몰래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삶에 많은 날들이 그렇게도 구슬펐다. 그리하여 이제는 질문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다름 아닌 나에게다.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나는 삶이 던진 질문에 허덕일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나는 무던히도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답을 찾기도 쉽지 않으려니와 찾았다 해도 그것은 내 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글을 쓰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정답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해답을 찾는 기회가 더 많아졌으며 만약 어떠한 답을 찾게 되었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답'하는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질문'하는 삶을 살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삶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내가 먼저 질문하는 삶을 살 것이다.
셋째.
'나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나르시시즘이나 악의적 이기주의와는 다른 이야기다. 나를 중심에 둔다 하여,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몰지각함을 고집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지향하고 싶은 바는 이제까지는 중심 없이 휘둘려 살아왔다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심은 무엇일까? 무엇에 힘을 실어야 할까? 다름 아닌 '나'다. 내가 힘을 실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이며, 중심의 무게추를 더하려면 내 마음과 생각에 하나하나를 더 쌓아 나가야 한다. 결국 삶에 대항하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싸우든 화해하든, 그 교섭에 이르는 최전선의 존재는 나 자신이니까 말이다.
알베르 카뮈도 삶의 부조리를 달가워하진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대항'과 그가 말하는 '반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영원히 돌을 굴러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저주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 형벌이라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우리는 어떻게 매 순간 다른 방법으로 또는 즐겁게 그 돌을 올려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항'과 '반항'이다. 삶은 세팅 값이다. 삶 또한 어떤 절대자에게 그 지령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삶'은 내 편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편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건 엔트로피 법칙이 대변한다. 가만 놔두면 삶은 내 편이 아닌, 내 삶을 무질서하게 만드는 방해꾼이 될 게 뻔하다. 그렇다면 에너지를 들여 그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야 한다. 이 에너지가 바로 '대항'과 '반항'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힘을 싣는 방법은 앞서 말한 세 가지.
받아들이는 것.
질문하는 것.
나를 중심에 두는 것.
이것들이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났고, 영문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삶을 향유하고.
소리쳐 묻고.
그것을 내 것들로 하나하나 만들어가야 한다.
삶에 대항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러하지 않은 자는, 그저 삶에 순응하고 부조리에 대항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무질서에 갇히게 될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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