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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31. 2023

'왜'가 없는 글은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글

글쓰기의 시작은 대개 '어떻게'로 시작한다.

어디 글쓰기뿐일까. 공부도, 시험도, 취업도, 재테크도... 심지어는 사람과의 만남까지. 수많은 방법론들은 지금도 허공을 가로지르며 난무하고 있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방법론을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정보의 홍수 시대. 알고리즘의 폭력 시대. 어찌 보면 '어떻게'에 매몰된 우리네 모습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다. 방향은 무시한 채, 어떻게 하면 빨리 무언가를 성취할까를 고민하는 건 한국인인 나도 예외가 아니다. 과정은 없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만사형통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만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방법론에 심취하다 보면 문득 어리둥절하게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미어캣처럼 '여긴 어디?', '난 누구?'를 외치게 된다. 그 모양새는 미어캣보다 더 우습다. 무언가를 열심히 했고, 무언가에 많은 것을 들였는데 정작 그걸 왜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그 모습은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일까. 삶의 농간, 농담에 휘둘리는 그 모습은 웃음은 나지만 코끝이 찡한 블랙 코미디라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인공지능으로 글 쓰는 법에 혈안이 되어 있다.

수많은 강의가 열리고, 원하는 글을 뚝딱 몇 초 만에 써낼 수 있다고 말한다. 혹할만한 요소다. 내 머리를 쥐어짜야 몇 톨 안 되는 단어와 문장이 나오는 인고의 시간에 비해, 그것은 절대적으로 방법론적인 아주 편리하고 순탄한 시도다. 안 해본 바가 아니다. 갖가지 인공지능 도구를 이용하여 글을 써 보았다. 원하는 글과 주제를 넣으니, 사람이 쓰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글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솔직히 두려웠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쓴 글은 내가 원하는 글이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입력하고, 또 아무리 조건을 많이 걸어도.

그 글은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내 글의 첫 독자는 '나 자신'이라고 말했다. 나 자신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며, 그 글은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가 없다. 스스로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글을, 나는 '나를 관통하는 글쓰기'라 명명한다. 나를 관통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통할 수 있다. 나를 관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나를 관통한다는 걸 무얼 말하는가?


나를 관통하기 위해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또 스스로 찾아야 한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그 무수한 사이, 마음을 관통할 수 있는 뾰족한 무언가가 생긴다. 그 뾰족한 무언가는 바로 '통찰'이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통찰, 그리하여 바깥의 세상을 나와 연계하여 더 깊고 넓게 생각하게 되는 통찰. 관통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막히고 체한 것을 뚫어주는 것과 같고, 나와 무언가를 이어주는 것과도 같다.


'질문'의 대 전제는 '왜'다.

그러니까, 나를 관통하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가 아니라 '왜'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이토록 내 마음을 요동하게 하는가. 나는 글을 써서 무엇을 이루고 싶고, 왜 혼자 보는 글로는 만족하지 못하는가. 내 안의 욕구, 내 안의 바람. 내 안의 상처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 어떠한 간절함.


'왜'라는 물음 없이 시작하는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 놓지 못한다.

필력을 올리고, 표현력 강한 문장에 대한 방법론을 습득했다고 치자. 그 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니,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글은 지속될 수 있을까?


그러한 글은 인공지능이 더 잘 그리고 빨리 쓴다.

앞서 말했듯, 주제와 조건을 넣으면 온갖 데이터를 끌어 모아 척척 글을 써낸다.


그러나 그 글이 무언가를 관통하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 보라.


그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나를 관통하는 글과 그러하지 않은 글의 차이.


다시, 그렇다면 우리는 '왜'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그 물음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글을 써 나아가야 한다.


'왜'가 없는 글은 인공지능으로 쉽게 대체된다.

인공지능이 쓴 글에 익숙해지면 '왜'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과 연계된 티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의 영화는 대개 인공지능에 귀속될 때 발생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어느 날, '왜'를 찾는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아마도 그날이 영화 속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는 날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글.

대신 써줄 수 없는 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나를 관통하는 글쓰기는 가장 개인적인 물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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