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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27. 2023

제 글의 논점을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깨달음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이다.

사람에겐 묘한 심리가 있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 누군가 내 글을 보고 평가할까 두려워하지만 굳이 글을 어느 곳에서라도 드러낸다. 정말 그것이 두렵고, 또 굳이 작가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일기로 끝내면 될 일이다. 그런데 굳이 브런치나 블로그에 글을 발행한다. 더 나아가, 조회수나 댓글을 슬쩍슬쩍 확인한다. 신경 안 쓰는 듯 하지만 조회수가 올라가면 기분 좋아하고, 몇 개의 댓글이라도 달리면 그래도 무언가 보상을 받은 느낌이다. 결국, 누군가 봐주길 바라는 것이다. 조회수나 댓글은 '인정'의 척도다. 그것으로 인정받고 싶은 심리가 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 직장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고 있다.

목적은 직장인 분들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자신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러나 그곳의 독자들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직장생활로 지쳐있기에, 회사와 동료에 대한 갈등을 품고 있기에. 다들 민감하고, 다들 차갑다. 브런치나 블로그의 이웃들이라면 따뜻한 댓글을 달아주련만, 그곳의 댓글들은 논점은 고사하고 글 자체를 읽지 않은 채 남겨지는 무언가다. 그러함에도 한 분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기에 어수선한 댓글에 요동하지 않는다. 요동하지 않는 방법은 댓글을 아예 읽지 않는 것. 그러하는 편이 서로에게 더 낫다.


그 커뮤니티에서 글 하나를 보았다.

국립대 교수라고 지칭하는 한 사람이 남긴 글이었는데, 그것은 학벌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주변 사례를 적어 놓은 글이었다. 민감한 소재여서일까.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민감한 소재에, 더 민감한 사람들. 좋지 않은 댓글들이 여럿 달렸다. 대댓글에, 작성자인 국립대 교수가 하나하나 글을 남겨 놓았다.


"제 글의 논점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다시 읽어 보시고 댓글을 남겨 주세요."
"제 의도는 그게 아닙니다."


손가락으로 입력한 글이었겠지만, 내게는 작성자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식은땀을 흘리며 설득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작성자는 커뮤니티 상단에서 그 글이 내려가거나 더 이상 댓글이 달리지 않을 때까지 자신의 글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볼 것이다. 작성자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 주길 바란 걸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명필이라는 찬사와, 요점을 콕 집었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받는 인정이라는 열매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나 작가, 글 작성자는 읽는 사람의 해석을 뛰어넘을 수 없다.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이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커뮤니티에서 내 글에 달린 댓글을 읽지 않는 이유다. 내가 아무리 A라는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써도, 읽는 이가 B라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B인 것이다. 다시 읽어, B를 A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독자의 몫이다. 댓글을 보지 않는다는 건, 무책임한 방관이 아니다. 독자의 해석에 개입하기보단, 그게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때론, 댓글을 읽을 때도 있다. 그러나 대댓글은 달지 않는다. 아무리 내 글에 대한 논점에서 벗어난다 해도, 나는 절대 반박이나 논점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쓴 메시지가 명확한지.

전달하는 방법에 문제는 없었는지. 더 쉽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는지를 돌아본다.


상대방은 댓글을 달고, 이미 다른 글에 또 다른 트집을 잡고 있을지 모른다.

내 글은 이미 잊었을 것이다. 그걸 붙들고, 내 의도는 이거니 저거니 하는 건 시간과 필력 낭비다. 어떻게 하면, 다음 글을 잘 쓸지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 낫다. 이미 틀어진 해석의 방향은, 바로 잡을 필요도 없고 추가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글쓰기를 한 초기엔, 좋지 않은 댓글이나 내 의도와 다른 해석을 내어 놓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진을 빼곤 했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때가 있다면, 스스로 깨달았을 때다. 내가 설득한다고, 더 설명을 한다고 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내 글이 부족해서라면, 그 또한 인정을 해야 한다. 단, 글쓰기를 멈추어선 안된다. 더 쓰고, 계속 써야 오히려 내 뜻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필력이 생기는 것이다.


내 글의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까지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세상 모두가 나를, 내 글을 사랑해 줄 거란 착각은 버려야 한다.


작가라면 말이다.


처음엔 쉽지 않게 다가온 현실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작가의 덕목에 포함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반대로, 성심 성의껏 댓글을 달아 주시는 분들께 한번 더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깊게,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남긴 댓글의 정도를 나는 느낄 수 있다. 논점과 메시지에 대한 찬성이든, 반대든. 진심의 정도가 녹아있다면, 그러한 해석들은 어느 것이라 해도 좋다. 이 또한 받아들임의 미학이다.


다시.

독자의 해석은 자유다.


그 자유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

작가라면, 그 자유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이다.

쓰는 사람에게든, 읽는 사람에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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