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글을 써 나가는 내가 참 다행이다.
글을 쓰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펜으로 쓰거나. 자판을 두들기거나. 종이에 쓰거나, 컴퓨터에 쓰거나.
사실, 이것들은 글을 쓰는 방법론에 관한 것들이다.
'글쓰기'는 방법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 쓰고 싶은가부터 시작하여 삶의 전반적인 느낌과 생각, 그리고 '나'라는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는 관점이라면 방법론 그 자체를 글쓰기라고 말할 수 없다. 글쓰기는 방법론 이상의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은 이 방법론으로 돌진한다.
'왜'는 없이 '어떻게'에만 골몰한다. '어떻게'만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방법론에 갇히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설령, 그 방법론을 잘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갇히면 글쓰기는 이내 멈추게 된다. 방법론 안에는 '나'라는 본질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본질이 아니라,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본질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나는 '글쓰기는 삶쓰기다'라고 말한다.
삶에는 나라는 자아가 깊게 배어 있다. 도통 알 수 없는 나라는 존재가, 삶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 안에서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더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이럴 때 나는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타인의 자극에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내게도 이러한 비겁함이 있었고, 내게도 또 이러한 용기도 있구나... 삶의 일련을 호흡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게 되고, 그러한 나를 다독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나는 아래의 명제를 주장한다.
첫째, 잘 살면 잘 쓸 수 있다.
둘째, 잘 쓰면 잘 살 수 있다.
이것에 동의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의 명제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그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내 삶은 더 풍요로워졌다.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며, 더 나은 글을 쓰고 있다. 여기서 풍요롭다는 말은 그저 좋은 것만을 일컫지 아니한다. 풍요로운 마음을 가진 자는, 그 안에 여유로움이 있다. 여유로움이 있는 존재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둘을 모두 포용할 줄 알게 된다. 그러하니 풍요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전의 삶에선, 둘 중 하나만을 갈구하려 했었고, 그것이 마음의 가난함을 불러왔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삶으로 글을 쓰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한 마디로, 잘 살게 된다. 잘 살면 또 잘 쓰게 된다. 이 선순환은 글쓰기가 내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다.
나는 오늘도 이 글을 쓰며, 많은 것들을 포용하기로 한다.
거부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들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잘 써야지.
잘 살아야지.
삶으로 글을 써 나가는 내가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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