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소멸될 존재의 소멸되지 않을 의지
나는 삶과의 부조리를 자주 다룬다.
영문도 모른 채 받아 든 생명과 삶은 참으로 고단하기 때문이다. 꽃길만 걷게 했다면, 나는 삶에 대한 아무런 불만이 없다. 불만은, 내가 원치 않은 삶을 받아 들고는 더 원치 않는 운명과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데에서 온다. 누가 숨을 붙여 달랬나, 나이를 먹게 해 달랬나.... 삶의 희로애락을 바랐나.
나는 사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이유도 모른 채 받아 든 삶을 허겁지겁 살고 있을 뿐이다. 혹자는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 그래. 아름다운 때가 분명 있다. 그러나 삶 그 자체를 아름답다고 통칭하는 건 옳지 않다. 사람이란 동물은 순간의 감정에 얽매여, 그것이 삶의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라고 착각한다. 또는, 삶을 아름답다고 자위하면서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불안함을 경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삶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 추하다거나 그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을 말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꼭, 이러한 의견에 반박하거나 반대되는 개념으로 몰아붙이는 자들이 있다. 나는 그저, 영문을 모르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어리둥절 한 자에게, 삶이 내내 아름다워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 친절히 그 인과 관계를 설명해 준다면 나는 삶을 아름답게 보려는 노력을 해보긴 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에게 삶에 대한 미스터리를 친절히 설명한 자가 없다.
그래서일까.
젊었을 때 나는 무수히도 삶에 저항을 해왔다. 결과는 어땠을까. 나만의 참패. 삶을 이길 도리는 정녕 없다.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는 상대에게 아무리 삿대질해봤자, 그 비밀은 상대에게 귀속되어 있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울다가 웃는 존재일 뿐이니 삶이라는 상대가 나를 보면 얼마나 가소롭게 여길 것인가. 누군가의 비밀을 쥐고 있는 자는 절대적인 '갑'이며, 그 반대의 존재는 더 절대적인 '을'이 될 수밖에.
이러한 모진 상황을 거치며 내가 느낀 건, 삶은 저항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항하려 하면 할수록, 빠지는 힘은 내 것이며 삶이라는 상대는 득세하곤 했다. 어린아이와 같이 바닥에 누워 지랄발광을 떨어봤자, 쳐다도 보지 않는 부모와 같이. 제 풀에 꺾인 나를, 삶은 그렇게 무시하듯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주어진 삶도. 영문을 모를 뿐, 이미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삶의 고난이 찾아오면, 나는 이 삶의 영문을 묻는 게 아니라 행복해지려 하거나 덜 불행해지려는 고민을 하게 된다. 알지도 못할 이유를 나만의 질문으로 바꾸어 그렇게 삶을 채워 나가는 것이다.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삶의 횡포가 조금은 잦아드는 듯하다.
삿대질하고 저항하던 내 손과 그 에너지를, 의미 있는 질문 하는 것에 쓰고 앞서가려는 마음을 다잡아 삶이 주는 수많은 숙제와 고민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니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의미는 내가 찾는 것이다.
삶이 주는 건, 삶 그 자체일 뿐.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다. 무엇을 찾아낼지는, 내 몫이다. 나는 때로, 이러한 결론을 삶에 백기를 든 비겁한 자의 합리화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것은 삶으로부터 도망가려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나아가고자 하는 곧 소멸될 존재의 소멸되지 않을 의지이기 때문이다.
받아들일 것이다.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저항하거나,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이 다짐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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