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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30. 2023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

나 자신이 가장 결여된 그 순간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이란 글 주제를 받았다.

이번 공동 매거진을 담당한 작가님께, 주제와 순번을 마음껏 정해 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주제를 받아 들고는 잠시 당황했으나 나는 어느새 내 지난날을 주마등처럼 훑고 있었다.


내 생게 가장 쪽팔렸던 순간이라.

'순간'이 아닌 '순간들'이 촤라락 지나갔다. 고등학교 등굣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넘어졌던 것부터 멀리서 본 친구를 부르며 달려갔는데 친구가 아니었던 일까지. 생각보다 많은 후보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사실이 결정장애를 불러올 정도였다. 그러나 주제어를 던져 준 작가님께서 '가장'이란 단서를 달아줬으므로, 나는 어떻게든 하나를 골라 이곳에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가장'의 기준에 부합되는 것을 명확히 기억해 내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때로 돌아가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했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신입사원 시절.

당시에도 취업은 전쟁이었다. 자기소개서는 최소 50개를 쓰는 것이 당연했고, 최종 입사한 인사팀 선배를 통해 나중에 들은 서류 경쟁률은 2500대 1이었으니까.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특히나 '문송'들은 취업하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나는 이름을 대면 누구도 모를 수 없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공채라는 특성상 나는 다행히 30여 명이라는 동기들도 얻을 수 있었는데, 언젠간 경쟁자로 돌변할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때의 동기들은 내게 큰 의지와 힘이 되었다.


그게 벌써 20년 전이다.

지금이야 펑퍼짐한 슬랙스 바지에 면티 하나 걸치고 출근하는 시대지만, 당시엔 빳빳한 셔츠와 정장 재킷은 물론 넥타이까지 함께 입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트함이, 나는 싫지가 않았다. 무언가에 소속되었다는 안도감, 더 이상 자기소개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누구나 알아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래서 나는 회사 로고배지를 재킷 옷깃에 달았다. 세상 모두가 그것을 봐주길 바랐다. 심지어 나 자신보다도 더, 그 로고를 사람들이 더 봐주길 바랐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동기 몇몇과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서너 명의 동기들이 신입사원으로서의 고충을 이런저런 에피소드로 풀어내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동기들의 옷깃에도 회사 로고는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실상은 멍하게 앉아 카탈로그를 보고 있거나 복사를 하는 게 전부였지만...) 각자의 그 하루에 일어난 무용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자리에 있던 한 아저씨께서 내 손을 툭툭 치며 무언가 말을 걸려했다.

우리 회사를 아는 걸까. 아, 우리 회사를 모를 리 없지. 무언가 궁금해서 말을 걸려는 건가?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무언가 대단하다는 말을 하려는 걸까? 뿌듯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친절하게 대답해 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 아저씨의 눈을 바라본 순간. 아저씨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눈빛과 턱의 움직임으로 내 그곳을 가리켰다. 뭐지?


아...

아...

아...

바지 지퍼가 열려 있던 것이다.


잘 차려입은 정장에.

옷깃에 붙어 있는 회사 로고에. 힘든 시기에 큰 회사에 취업했다는 알 수 없는,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우월감에. 나는 취해 있던 것이다. 너무나 취해 있어, 회사 로고를 신경 쓰는 동안, 바지 지퍼는 살피지 못한 것이다.


나는 재빨리 지퍼를 올렸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내가 숨는 게 아니라 이 상황과 주변 모든 사람을 짓이기고 한데 뭉쳐 그 쥐구멍 속으로 쑤셔 넣고 싶었다. 지퍼를 올린 후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변 동기들도 숙연해진 분위기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하다.

동시에, 신입시절의 풋풋함에 웃음을 짓기도 한다. 가장 창피하고 부끄럽고 쪽팔렸던 순간은 과거이고, 지나간 것은 웬만해선 모두가 아름답다. 그 순간의 화들짝 함은 직접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을 떠올리는 지금은 생각하는 것이니까. 과거의 나에겐, 나조차 100% 관여할 수가 없으니까.


화끈함과 풋풋함을 함께 느낀 그 이후로, 나는 회사 배지를 달고 다니지 않았고 무엇보다 바지 지퍼를 먼저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큰 회사를 다니면 나도 커질 거란 착각은 버린 지 오래다. 본업에서 업을 찾아가는 것이, 회사의 여부에 따라 나를 재단하지 않는 방법이란 깨달음도 20여 년의 직장생활 중에 얻은 소중한 자산이다. 회사 배지는 '조건'을 상징하고, 바지 지퍼를 '자아'라고 가정해 본다면. 내가 더 챙겨야 할 것은 그러니까 '나 자신'인 것이다.


정말 그렇다.

살면서 가장 스스로 자랑스럽지 못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자아'보다 외부적인 다른 것들을 더 신경 쓴 그 순간들과 일치한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조건을 우선시하거나, 본질은 모른 채 무조건 무언가를 쟁취하고 보자고 했던 의미 없는 싸움들. 모두 '나 자신'이 결여된, 의미 없는 발버둥들이었다.


고로, 살면서 가장 쪽팔린 순간은.

살면서 나 자신이 가장 결여된 그 순간인 것이고, 나는 매 순간 바지 지퍼 살피듯 그렇게 스스로를 챙기자고 마음먹는다.


쪽팔리게 살지 않기 위해서.


나에게든.

그 누구에게든 말이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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