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사랑을 알아?
중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들 2명과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과연 그것을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이야기를 지어내 글로 썼으니 일단 소설이라 칭해두자. 내용은 당연히 남자와 여자의 로맨스. 현생에서는 남학생과 손 한 번 잡아본 일 없는 중2들이 써낸 로맨스 소설은, 그리하여 상상의 나래로 가득 찼거나 다른 책에서 보고 들은 걸 짜깁기한 수준으로 세 편 모두 내용이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진지한 자세로 소설을 썼고 소식을 들은 반 친구들은 그걸 돌려가며 읽는 지경에 다다랐다. 인기가 꽤 좋았다. 아이들은 이번엔 누구 차례지? 하며 순서까지 정해 놓고 읽었다. 그때 내가 쓴 소설의 제목이 <추억>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어떤 남녀가 있었는데 사랑을 하다가 남자의 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고 여자의 부모가 반대한다. 남자는 현실을 바로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즉각) 받아들여 영국으로 떠나고 여자는 남자를 따라가려고 가출을 감행하는데...! 공항까지는 갔으나 비행기를 타지 못한 여자. 여자의 아버지가 공항까지 데리러 와서 이렇게 말하며 A4용지 5페이지 분량의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얘야, 사랑은 꼭 결혼으로 되는 것은 아니란다. 네가 당장은 슬프겠지만 조금 지나 봐. 그 애는 네 가슴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테니."
추억 같은 소리 하고 앉았다. 사랑을 이렇게 싱거운 것으로로 만들어 놓다니. 비유법도 없이 그저 아름다웠다, 멋있었다 같이 일차적인 표현만 반복되던 나의 첫 소설. 사실 이 내용의 상당 부분은 당시 100번도 넘게 읽었던 만화책 <캔디 캔디> 속 장면들에서 왔다. 정식으로 선보였다가는 단박에 표절시비가 붙어 감옥에 갈 만큼 비슷했다. 그래도 착한 우리 반 애들은 수업 시간에 교과서 아래 우리들의 소설노트를 몰래몰래 숨기고 읽으면서 숨을 죽여 낄낄거렸다.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우리를 부러워 한 어떤 애가 자기도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셋에게 작품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는데...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이 부분만 생각난다. 남자가 여자에게 속옷 세트를 선물하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
"내 앞에서 입어 봐."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이렇게 훅 들어오면 방어는 어찌하라고! 시대는 1989년. 그때는 남자친구가 있으면 엄빠나 선생님에게 혼나던 시절이었다. 순진한 애들은 아직까지 남자랑 옆에서 잠만 자도 임신이 되는 줄 알기도 했다. 가까운 친구 중에 남자 친구가 있는 애도 없었다. 그랬던 우리들인데 남자 앞에서 속옷을 입어 보라는 대사라니! 만 12살의 순진한 여학생들이 이런 장면을 로맨스로 받아들이기에는 시절이 하 수상하였다.
그 후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걔 너무 저질 아니니? 좀 이상한 거 같아." 소설이 야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점점 그 친구마저 발랑 까진 애로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소설노트를 감추고 반 애들에게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
현재 마흔 살이 훌쩍 넘은 나는 이제 <옥보단> 같은 영화도 자랑스럽게 볼 줄 아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때 우린 어렸다. 성숙하지 못했다. 친구가 야한 소설을 썼다 하더라도 크게 웃고 지나가면 될 일인데 그래주질 못했던 게 미안하다. 내 소설 창작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자면 그 친구도 어디선가 보고 들은 걸 각색하여 쓴 것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보다 수컷들의 욕망을 더 빨리 알아차렸던 것뿐일 수도 있는데.
'내 앞에서 입어봐 사건' 이후 우리 반에서는 아무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싸해진 분위기가 우리들의 창작 욕구를 납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학생 소설 창작단 교실 습격사건은 짧은 기간 내에 마무리되었다. 한편으론 우습고, 한편으론 반성되는 그때 그 시절. 문득 반 친구들 중 그걸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궁금해졌다.
* 어린 시절 추억에 젖어 본 글은 차분하게 끝을 맺었지만 잠깐!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댓글로 5분 넘는 분들의 요청이 있을 경우, 저의 첫 소설 <추억>의 원문을 올려보겠습니다. 읽다 보면 여러 군데서 허를 찔리게 되실 거예요. 전개가 매우 빠르고 어처구니가 없거든요. 한국의 중2가 무섭다는 게 그런 걸 겁니다. 이를 테면 이런 지문. "꼴값하고 있네."
* 그 후 댓글의 요청 덕분에 다음의 소설을 브런치에 올렸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https://brunch.co.kr/@songyiahn/559
글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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