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Jun 11. 2016

[포토스토리] 꽃을 돌아보게 만드는 여유, 네덜란드

마음도 햇살에 좀 널어놔야겠다. 당분간. 좀.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출간 정보

교보문고Yes24알라딘인터파크



벌써 약 20년 전이다.

사회에서 주먹 좀 썼다는, 소위 말하는 조직폭력배의 일원이었던 내 군대 후임은 그 커다란 덩치를 쭈그려 자신의 관물대 앞에서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트 웨이터 출신의 선임병이나 법학을 전공했다는 동기 녀석도 주말이나 여유 시간엔 어김없이 같은 자세로 뭔가에 열중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 시간엔 모두가 시인이었고 문학자였다. 책을 읽거나, 시를 지어내던가 편지를 쓰던가. 주먹 좀 썼다는 후임의 편지를 훔쳐보니 각양각색의 색연필이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하얀 편지지가 마치, 어느 여자 초등학생이 엄마 화장대 앞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화장을 그득하게 그려댄 그것과 같이 칠해져 있었다. 군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람을.


군대에서의 힘들었던 기억을 제하고 보면 꽤 의미 있는 시간들이 있었다.

낮은 포복을 하며 땅바닥에서 기던 그때는 눈 앞의 흙과 콧 내음으로 들어오던 그 냄새가 새록하기도 했다. 어느 숲 속 한가운데서 매복을 하고 있노라면 그 푸른 나무와 가지들, 그리고 풀들은 어느새 친숙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보초를 서며 바라보던 달 밝은 밤의 하늘과 어우러진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의 실루엣은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함께 하나의 그림이 되기도 했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그래도 조금은 더 있었던 군대 시절에 느낀 것들이 소중하게 기억되는 이유다.


군대가 조폭을 여린 감성으로 편지 쓰는 사람으로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마음의 여유라는 것이었다. 몸은 힘들지만 단순해지는 생각과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약간의 강제성이 동반된 자기반성. 그러다 보니 풍부해지는 감수성은 싸움의 용도로 쓰이던 주먹을 아기자기한 편지를 쓰는 데 사용하게 된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햇살이 따사로운 6월의 어느 날. 오늘. 점심시간 그간 복잡했던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산책에 나섰다. 맘의 여유가 없었을뿐더러 그간 날씨가 산책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더랬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미래와 당장에 산적한 업무 그리고 이슈들. 햇살에 이끌려 그래도 나온 산책길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지나치다 작은 꽃 무리들을 만난다. 그래, 주위에 꽃이 많았지 여긴. 그러고 보니 푸른 잔디와 나무들. 살랑이는 바람. 곳곳을 유유히 흐르는 운하까지. 뒤뚱거리는 오리들의 여간 여유로운 모습 속에서 난 군대에서 느끼던 마음의 여유를 잠시 기억해냈다.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반대로,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 맘에 여유가 생길 수도 있음을 다시 한 번 더 깨닫는다. 아무래도 오늘 산책 잘 나온 것 같다.


유유히 흐르는 운하를 보며 누군가는 말한다.

물이 생각보다 맑지는 않네요.
물결에 따라 반짝이는 햇살이 정말 예쁘네요.

누군가를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오롯이 그 사람의 성격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날의 감성과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분이 좋고 마음의 여유가 있어 물결의 햇살을 보는 것일 수도 있고, 그 날의 기분이 가볍지 않아서 물의 탁한 정도를 먼저 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뭐, 성격이 그렇다고 할 수도.


꽃을 보는 여유를 주는 이 곳, 네덜란드

푸르른 나무. 유유히 흐르는 운하. 저기 멀리 한가롭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우리네 눈으로 보면 부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저 사람들은 '불행'이라는 단어를 알기나 할까? 각종 통계에서 보여주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행복 지수는 그들의 모습과 잘 어울렸다. 나라도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으면 어쩌면 시인이나 화가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물론, 많은 네덜란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자신이 스스로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라왔고 이런 걸 보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나는 토종 한국사람으로서 그들처럼 여유롭게 살 수 없다.

그러고 싶지만 천성이 그렇지 않다. '여유'라는 것을 쫓을수록 '불안'이라는 기재는 소스라치게 들러붙을 것이다. 그래도 잠시의 '여유'는 삶의 활력소다. 잠시의 그것을 잠시라도 즐기지 못하면 우리는 잃는 것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 잠시라도 좋다. 그런 면에서 네덜란드는 잠시라도 그런 여유를 들게 해주는 곳이다. 곳곳의 푸른 평야와 목초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과 소, 그리고 양 떼를 보다 보면 꽃이 보인다. 그리고 여유가 보인다. 맘 속에 여유가 얼마나 없는지도 비로소 보게 된다. 여기저기 도처에 여유라는 것이 만연해 있는데, 내 맘속에만 그것들이 없을 뿐이다.


업무에 지쳐 메마른 나에게 저기 하나의 작은 꽃 무리가 나에게 속삭인다.

나 어때? 예쁘지? 나 배경으로 사진 한 번 찍고 기분 풀어. 마음의 여유를 좀 가져봐!


점심시간의 특별날 것 없는 발걸음이었지만, 나는 잠시 마음속 여유를 기억해냈다. 군대에서도 만들어내던 마음의 여유. 널린 것이 푸르름인데 그 푸르름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닫힌 마음. 몸만 햇살에 노출시킬 것이 아니라 마음도 햇살에 좀 널어놔야겠다. 당분간. 좀.


작은 색색의 무리들이 나에게 속삭였다. 사진 찍고 잠시 쉬어가.


다음 생엔 네덜란드 오리로 태어나는걸로.


매거진의 이전글 [포토스토리] 네덜란드 '왕의 날' 에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