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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l 16. 2023

메타인지를 넘어 메타정서로

마음이라는 산을 올라보길.

높은 곳에 올라
도심을 바라본 적이 있다.


전쟁터와 같은 그곳이 평화로워 보였다.

나를 가두고 있는 회색빛 빌딩과 사무실은 잘 정렬된 성냥갑처럼 보였고, 분노를 유발하는 교통 체증은 작고 귀여운 장난감 자동차들의 행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 사람이라는 존재가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허탈하면서도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나는 왜 그리 아등바등 살아왔을까? 좀 더 여유롭게 살 순 없었던 걸까? 나는 왜 그 사람을 좋아하고, 또 그 사람을 미워했을까? 그때 그 사람에게 왜 그랬을까? 좀 더 배려 있는 마음을 가졌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저 한 번 웃고 넘길 일을 나는 왜 그리 일을 크게 키웠을까? 인생 뭐 있다고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번 더 포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새로운 삶을 살자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하산(?)을 한 후, 다시금 전쟁터의 병사가 되는 데에는 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랑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좌절하며 삶의 풍파에 녹아들었다. 다시금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휘말린 삶은 고요할 수 없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치며 ‘오늘을 버티자’ 외치며 잠자리에 드는 날이 반복되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이 있듯이 풍경엔 여유가 있고, 근경엔 소란이 있다.

우리는 대개 남의 삶은 쉽게 평가하고 부러워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잘 굴러가고 잘 풀리는 것 같다. 내 인생만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자신을 엄습한다. 이처럼 남의 삶이 흥미롭고 여유 있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삶은 내게 있어 풍경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에게 있어 내 삶은 근경이다.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을 것들이 세세하게 그리고 덕지덕지 보인다. 지금 당장 내 주변의 사물들을 보자.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고, 의식하지 못했던 흠집이 발견된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만, 자세히 봤을 때 실망하게 되는 것들도 꽤 많다.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사무엘 존슨은 ‘외적인 영향에 좌우되고 싶지 않다면 먼저 자기 자신의 격렬한 감정부터 초월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건 초월이란 단어다. 초월은 경험이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그 바깥 또는 그 위에 위치하는 일을 말하는데, 범위를 벗어난다는 의미가 ‘나는 그것과 상관없다’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즉, 초월은 내 경험과 인식을 가지고 다른 각도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봄을 말한다.  


메타인지를 넘어
메타 감성으로


'메타인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모르는 것. 더불어, 나 자신을 탐구하고 관찰하여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이 바로 메타인지의 핵심이다.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의 확장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경험을 했듯,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그러하지 않은 관계로 이성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사람의 뇌는 파충류 뇌, 포유류 뇌, 인간 뇌라는 세 가지 형태로 구성이 되어 있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건 '뇌간(파충류 뇌)'다. 생존과 생명을 담당한다. 그다음의 뇌는 '구피질(포유류)'로 감정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신피질(인간 뇌)'는 이성을 담당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성을 담당하는 뇌는 가장 늦게 발달했다. 고로, 우리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이성적으로 많은 걸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생존'과 '감정'은 그것보다 우선시되어 작동하며 알게 모르게 우리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많이 행하고 있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메타인지'말고도 '메타정서' 능력을 길러야 한다.

즉, 객관적으로 나를 보는 범주에 '감정'과 '감성'이란 요소도 포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려면, 더 깊고 더 자세히 요동하는 것들을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메타감성,
마음을 등산하여 내 감정을 조망하는 것


우리는 마음의 등산을 해야 한다. 높은 곳에 올라 근경을 벗어나야 한다. 풍경을 보려 노력해야 한다.

감정이 풍경이 될 때, 우리는 감정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자극과 반응 사이에 존재할 수 있다. 자극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우리 삶이 얼마나 팔랑이는 지를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감정에 요동하기보다는 감정의 의미를 알아채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초월이다.


감정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감정이 근경이 되는 순간 감정은 다스릴 수 없다. 이성으로도 제어가 안 된다. 다만 우리는 감정을 근경과 풍경으로 오가며 오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그것의 의미를 여유롭게 바라볼 수는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감정과 함께 조금은 더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된다.




자극과 반응.

이 사이에, 내게는 아무것이 없었다. 즉, 자극이 오는 대로 반응하며 살아왔다. 알다시피 '자극'은 외적요소다. 나는 평안하고 싶지만, 외부의 자극이 주어지면 나는 평안함을 잃고 분노했다. 반대로, 스스로부터의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에 쾌락을 느끼기도 했다. 그 모든 건, 본질적인 나로부터의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허무함을 느꼈고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메타인지와 메타감성을 한 후, 내게는 자극과 반응 사이를 늘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자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능력. 어떤 반응을 내어 보일까... 그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쉬운 건 아니다. 지금도 나는 자극에 욱, 하고 반응하는 적이 여러 번이다.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은, 내 감정을 조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메타인지와 메타감성.

해봐야 는다.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메타인지와 메타감성의 능력을 좌우하는 핵심이다.


오늘, 꼭.

마음이라는 산을 올라보길 바란다.


내려다 보이는 풍경엔 어떤 것이 있는지.

근경과 풍경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러는 사이, 우리는 우리 각자의 자아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가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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