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행복의 상관관계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반대로 없으면 불행할까?
이 논제는 참으로 쉽지 않아.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걸까, 죽어가고 있는 걸까란 논제만큼이나. 논제의 모호함은 예외성에 기인해.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없어도 행복한 경우도 분명 있으니까.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죽음이 필연인 우리 인생은 저마다의 집행일이 다른 사형수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결론부터 말해줄게.
돈이 있으면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행복은 액수에 비례하지 않는다.
못 믿겠다고?
그럼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 겸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 교수를 초대해야겠구나. 잠시 그분의 말을 읽어 볼까?
소득 만족 수준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돈으로 더 많은 경험을 살 수 있을진 몰라도, 비싸지 않은 경험들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일정 부분 소실됩니다.
- 대니얼 카너먼 인터뷰 -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
우리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매우 배고픈 상황이라고 해보자. 그러다 드디어 무언가를 먹을 수 있게 되었어.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기분이 좋아져.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황홀경이 펼쳐지지.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거야. 그런데 말이야, 배가 불러지면? 행복감은 확 줄어들어. 속이 더부룩하고, 살이 찔 거란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더 안 좋아지지. 산해진미가 아무리 많아도 행복감은커녕, 오히려 행복도를 더 떨어뜨리고 말아.
이와 같은 현상을 '소득의 포만점'이라고 해.
맛있는 음식이 아무리 많아도 배불러진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높은 소득으로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포만감을 느끼고 나면 더 이상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는 거지.
한 연구기관에서 전 세계 170여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있는데, 소득이 올라가면서 삶의 만족도도 함께 올라가는 경향을 증명해 냈어. 그러나 소득이 특정 구간을 넘어가면 행복감은 오히려 떨어지는 모습을 발견했지. 그 지점이 바로 '소득의 포만점'이야. 배가 불러 더 이상 그 어떤 음식도 행복감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말이야.
왜 돈의 액수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을까?
'행복공부' (김희삼 저)란 책에 보면 왜 돈이 행복을 절대적으로 보장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
첫 번째 이유는 '사회적 비교'때문이야.
다들 배고픈데 나만 맛있는 빵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우쭐 대기도 하고, 빵을 조금 떼어주며 선심을 쓰기도 하겠지. 그런데 어느 날, 다른 한 친구는 빵에 음료수를, 또 다른 친구는 맛있는 스테이크를 옆에서 썰어 먹고 있어. 뭔가 익숙하지? 당장 SNS를 봐봐. 다들 매일 소고기를 먹고 있고, 해외여행을 하거나, 비싼 물건을 플렉스 하고 있잖아. 이러니 기분이 어때? 질투도 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내가 100만 원이 있으면 1,000만 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부러워하게 되어 있어. 만족하지 못함으로써 인류는 발전해 왔지만, 반대로 속도 곪을 대로 곪아 있는 것도 사실이야.
두 번째 이유는 '적응'인데.
너희도 잘 알 거야. 우리가 얼마 전에 여행을 다녀왔잖아. 너희는 시장에 있던 손으로 만든 철제 비행기 장식품에 꽂혔지. 마치 저것만 사주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엄마 아빠 말 잘 들을 것처럼 아양을 떨었지. 결국, 너희는 그것을 손에 쥐었어. 행복해 보이더라.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니 어땠지? 그 장식품을 샀다는 것도 잊은 채, 너희는 포장을 뜯지도 않고 방에 들어가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어. 살 때는 즐겁고 행복했지만, 그 행복감은 단 며칠을 가지 못한 거야. 내 것이 되면, 익숙해지면 덤덤해지기 마련이거든.
오징어 게임 재밌게 봤었지?
돈이 많은 할아버지 오일남은 이렇게 말했어.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돈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뭘 사고 먹고 마셔도 결국 다 시시해져 버려.
어때. '포만감'이란 말이 다시금 떠오르지?
평생 놀고먹어도 될 돈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마약에 손을 대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 뭐가 아쉬워 저럴까...라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들의 삶도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거야.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아빠가 너희보다 좀 더 긴 세월을 살아보니 좀 알겠더라.
행복은 '강도(Intensity)'가 아니라 '빈도(Frequency)'라는 것을.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사랑을 쟁취했을 때엔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는지 모른단다. 그러나 이내 '포만감'과 함께 그것들은 일상으로 귀속되었고, 그것을 얻은 그 순간만큼의 기쁨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는지 몰라. 자극은 더 크고 센 자극을 바라기 마련이거든. 이 지점에서 행복을 찾게 되면, 사람은 소비적이고 소모적으로 변해.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의 지갑을 열게 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거든. 그러는 사이 일상의 소박한 행복들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은 상실되고 말지. (이 '능력'이란 말에 특히 주목해 볼까. 여기에 행복 수치를 올릴 수 있는 비밀이 있단다.)
그래서 아빠는 가족이 무척이나 소중하다고 생각해.
가족은 일상의 소중함과 소박한 기쁨, 그러니까 행복의 빈도를 높여주는 서로의 존재거든.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던 엄마와의 연애시절도 좋았지만, 지금은 안정과 인정에서 오는 세로토닌의 사랑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단다. 가족들과의 산책, 대화, 여행에서 아빠는 정말로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걸 절실히 느껴. 비싼 차를 사는 것보다, 우리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게 더 좋으니까. 비싼 차를 사더라도, 그건 소유욕을 채우기 위한 게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할 것들을 떠올리고 어딘가로 갈 수 있는 수단으로써의 의미가 아빠에겐 더 크니까.
이 능력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을 거야.
앞서 이야기했지만, 포만감을 느끼기 전까진 소득과 행복의 정도는 비례해.
재밌는 사실을 말해준다면 우리나라의 '소득의 포만점'은 연 1억 원이 넘어. 다른 나라 평균보다도 더 높지. 그만큼 우리는 물질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선 기본 또는 그 이상의 소득을 확보해야 행복감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야. '돈은 행복과 상관없다...'라는 잘못된 합리화는 금물. 포만점이 꺾이는 지점까진 소득에 대한 능력을 키워야 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포만점이 지나가면 삶이 시시해진다고 했지?
강렬한 자극 뒤에 더 큰 자극을 원하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소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것. 아빠는 이것이 더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이 능력이 있다면, 소득의 포만점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행복감은 더 클 수 있다고 봐. 돈의 액수에 상관없이 말이야. 이건 아빠가 직접 경험을 해봐서 안단다. 소득의 포만점을 넘어 보니, 정말로 그 지점은 있는 게 맞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행복의 빈도를 높여 가야 한다는 거야. 아빠가 힘들고 지칠 때, 가까운 곳이라도 가족과 함께 떠나려고 하는 이유란다. 아빠는 영국의 유명 셰프가 만든 햄버거보다도, 너희와 함께 끓여 먹는 라면이 더 좋아.
행복은 상대적으로 절대적이고,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행복은 스스로 규정해야 해. 더불어, 기분의 굴곡이 행복인지도 자문해야 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으로는 행복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돼. 순간의 기분의 피치를 올리려는 시도는 모두 허탈함으로 귀결되고, 이건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거든.
앞서 말한, 두 가지 능력에 몰두해라.
돈도 잘 벌어야 하고, 행복을 알아차리는 것도 게을리하지 마라.
쉽진 않겠지만.
아빠가 내린 결론은 이 두 가지 능력에 매진할 때 행복을 마주할 가능성은 확실히 더 크다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