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올라 정상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그런 생각 말이죠. 세상 모두가 내 발아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짓눌려 살던 존재의 해방된 희열이랄까요.
그러나 동시에 성냥갑 정도의 크기로 보이는 어느 빌딩 안에서 아웅다웅하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뭐 그리 큰 일이라고 그리 아파하고 또 아파했을까요. 거대해 보이던 자동차들도 저 멀리 장난감과 같고, 나를 힘들게 하던 사람들의 모습은 가늠하기 조차 힘들 정도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발아래 둔 것만 같은 거만함.
한낱 개미 크기와 같은 내 존재를 떠올리는 겸손함.
정상에서 느끼는 이러한 양가감정은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 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거만해지기보단 (강제로) 겸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 학년이 올라가고 나이를 먹어가며 되는 것보단 그렇지 않은 게 더 많다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거만할 새도 없이, 우리의 날개는 꺾이고 세상에 무릎 꿇는 일들은 더욱더 많아집니다.
내가 겸손하지 못해서일까.
너무 거만하기에 온 시련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거만해본 적도 없으면서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에 빠진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릴 때 두 발 자전거를 배워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처음엔 뒤에서 누가 잡아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이내 스스로 달리기 시작했을 땐, 뒤에서 잡아준 누군가를 잊고 자신을 대견해합니다. 벅찬 가슴은 존재를 한껏 거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모습을 보며 뒤에서 잡아준 그 누군가는 거만한 존재를 기분 나쁘게 봤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흐뭇한 미소와 함께 바라봤을 겁니다. 순수하고도 당돌한 그 거만함이 귀여워 보였을 겁니다.
그 순수하고 당돌한 거만함을 잊은 지 오래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하도 짓누르니, 짓눌림에 익숙해졌던 터라 거만해질 새도 없이 겸손해야 한다는 관념에 빠진 겁니다.
겸손하려면 거만해야 합니다.
거만할 때 깨달음은 찾아오고, 그 깨달음을 통해 성장하며 겸손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낮추거나 탓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를 말합니다.
즉, 나를 낮추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높이가 필요하다는 역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다시, 산 정상에 올랐을 때를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때 느낀 거만함과 겸손함.
그 둘의 감정을 어느 하나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아마도 우리는 겸손하기에 거만할 수 있고, 거만하기에 겸손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 양쪽을 오가는 사이, 어쩌면 우리는 한 뼘 더 자라 있을지도 모르고요.
분명,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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