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이란 말을 찾아보면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뜻이 나온다.
손절(孫絶)
대를 이을 후손이 끊어짐 (어학사전)
우리가 알고 있고 주로 사용하는 뜻은 '손해를 감수하고 파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손절매(損切賣)'를 줄여 쓰는 말이다.
대개 주식이나 돈과 관련된 경우에 사용하지만, 사람 관계에서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건 무언가 큰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속시원히 누군가를 손절하더라도, 어떻게든 상대방과는 무엇으로든 엮여 있어 그 끝은 개운하지가 않다. 그 불편한 마음이 무언가를 손해 본 것 같게 만들고, 그렇게 사람을 손절한 것이 맞겠나 싶은 회의를 불러오기도 한다.
최근에 몇몇 사람을 손절했다.
사람과의 손절은 쌍방과실이다. 누가 더 잘하고, 누가 더 못하고가 없다. 그러나, 당장은 '쌍방 과실'이라고 이야기할지언정, 나는 이것이 '과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길게 보면 이것은 '쌍방 배려'라고 보는 게 맞다. 맞지 않는 걸 삐그덕 거리며 가는 데엔 한계가 있다. 아니다 싶으면 '과실'을 구실로, '배려'를 하고자 한다.
재밌는 건 그 이후 그것이 정말로 손절, 그러니까 손해를 본 후회스러운 선택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판가름 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차게 손절해도,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난다. 또는 그 과정을 거쳐 더 돈독하고 끈끈한 인연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것을 기대한다.
어차피 쌍방 과실이라면, 갈등이 촉발되어 고조에 이르렀을 때 양 갈래 길에서 서로의 선택은 분명해진다. 그 길의 이름은 각각 '과실'과 '배려'다. 과실로 결론을 내어도 좋고, 배려로 끝맺어도 좋다.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고, 그러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리 갈구해도 연은 닿지 않는다. 또는, 악연이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일찌감치 떨어지는 게 낫다.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을 보고.
웃고 떠들 땐 누구라도 좋다. 그러나 함께 일해보거나, 위기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서로에게 행하는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진가를 알게 된다. 요전 날의 사람 손절이 그랬다. 이해하지 못하고, 속도가 느린 건 이해하지만 상대방을 힐난하거나 잘 되지 않는 걸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걸 나는 참지 못한다. 바로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다. 서로를 탓하며 만들어내는 프로젝트 결과물은 그 누구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둘은 '쌍방 과실'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무엇 하나라도 배운다면. 시간이 흘러 왜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는지를 조금이라도 헤아리게 된다면 이는 '쌍방 배려'가 될 수 있다. 다음의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조금은 더 스스로를 돌아보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얻었다는 것도 착각이다. 사람은 소유물이 아니고, 상대방이 언제나 내 편이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하다.
우리네 인생은 어차피 각자의 방향으로 걷는 각자의 길이다.
방향이 같을 땐 같이 걷고, 방향이 달라지면 따로 걸으면 된다. 그러다 다시 만날 수도 있고, 그러다 영영 따로 갈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고 인연인 것이다.
손절했다고 마음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
손절 당했다고 아파할 필요도 없다. 방향이 다른 것이고 길이 다른 것이다. 갈림길에서 맞이하는 불편한 마음은, 서로에게 한 언행을 돌아보며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찾으면 된다.
그러하면 '쌍방 과실'보다는 '쌍방 배려'의 상황이 더 많아질 것이다.
배려는 마음을 쓰고 보살피며 돕는 것을 말한다.
그 대상은 상대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손해 볼 것은 없다.
마음은 마음껏 불편해해도 된다.
그저 묵묵히, 나의 길을 걸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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