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큼 삶을 교란하는 게 또 있을까 싶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고, 기분이 자아와 삶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건 머리로 알고 있음에도 행복을 느낌과 동시에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자각하게 된다. 하여, 행복에 도취되면 마치 삶의 목적 그 자체가 행복이 되고 만다. 행복하지 않은 기분이 들면, 행복했던 그 순간을 부여잡고서라도 버틴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앞서 나는 행복의 '순간'이라 말했다. 그렇다 행복은 대개 '순간'이다. 행복을 알아차리는 순간 행복의 게이지는 떨어진다. 행복하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행복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꼬리를 내빼는 행복이란 녀석을 보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또다시 이러한 순간이 올까? 이 행복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영혼이 느낄만한 행복은 한 조각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이것이 실상 행복의 낯짝이다.
붙잡으려 할수록, 유지하려 할수록, 손에 넣고 마음에 가두려 할수록. 행복은 희미해지기 일쑤이며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을 농락한다. 농락의 수준이 가히 가관이다. 가련한 존재를 가지고 노는데 도가 텄다. 아마도 행복의 낯짝은 매우 두꺼울 것이다. 낯짝의 두꺼움은 대개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표현을 대체하며, 그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후안무치'의 전형이다. 행복, 그 자체를 바라는 많은 존재가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행복은 그 스스로를 쉽게 허하지 않는다.
그런데 '행복'이란 녀석의 또 하나 재미있는 특성이 하나 있다.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알고 보니 행복은 주위에 만연하다는 걸, 파랑새라는 동화는 이미 그 옛날부터 말해왔으며 행복하다는 기분은 과거를 회상할 때에도 가능하며 미래를 밝게 그릴 때에도 가능하다. 이로써 행복은 시공을 초월하여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할 것은, 행복의 낯짝에 불평불만하는 게 아니라 그 녀석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니, 찾을 필요도 없다. 이미 어디에나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된다. 다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 급격하게 높아지는 기분의 솟구침이 행복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슬픔도, 우울함도, 무기력도. 기쁨도, 경쾌함도, 솟아나는 에너지를 느끼는 것도. 그 모든 게 행복의 일환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기분이 좋아야 행복이 아닌가? 그렇다. 맞다. 그러나, 좋은 기분이 행복이라는 명제를 고착화시키면 삶은 고단해진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은 여기로부터다. 행복이 강박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가?
행복의 낯짝이 두터운 만큼, 행복에 대한 내 관념도 그 낯짝이 두터워야 한다.
아무렴 어떠랴. 웃음도 눈물도 행복이라고 규정하면, 행복에 대한 강박은 사라진다. 행복이 왔을 때에도 요동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왔다가 스쳐가는 바람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것이 왔다 갔음을 알아차리는 게 행복을 만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것을 붙잡으려, 다시 그것을 재생하려 힘을 빼지 말라. 기분 좋은 것도 행복이고, 그러하지 않은 것도 행복이라는 걸. 낯짝 두터운 행복에 대한 내 관념이 그것을 외친다.
우리 삶의 목적이 기분이 될 순 없다.
그러나 기분에 따라 삶의 목적이 달라질 수 있다.
머리를 따른 다는 착각은 버려라.
기분과 마음이 얼마나 우리 삶을 교란하는 지를 돌아보라.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행복의 낯짝보다 두터운 행복에 대한 관념의 낯짝을 갖는 것이다.
받아들이다 보면 알게 된다.
삶의 부조리도, 역설도. 패러독스도. 모두 우리 삶을 흔들어 놓으려는 삶이란 무대 위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러한 상반되고 상대적인 것들이 얼마나 큰 안정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를. 어느 쪽으로 치우쳐야 한다는, 애매함을 벗어나려는 강박은 버려도 좋다.
그 경계에 서서, 행복함과 행복하지 않은 것들을 관망하라.
당신의 낯짝을 더 두텁게 하라.
뻔뻔함은, 삶을 교란하는 것들에 대한, 삶의 부조리를 극대화하는 것들에 대한 가장 좋은 반항의 한 방법이다.
[종합 정보]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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