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거짓, 절망이라는 진실

by 스테르담

유무상생(有無相生).

있고 없음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천하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추함이라는 관념에서 비롯되고, 추하다는 판단은 아름답다는 개념에 반하여 성립된다. 흔히들 말하는 선(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악(惡)을 마주할 때 선의 기준은 그어진다. 반대로 악을 마주하고 나서야 우리는 선에 대해 골몰한다. 어렵고 쉬운 것은 서로를 보완하고, 길고 짧은 것은 서로의 척도를 가늠하게 한다. 길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고, 짧다고 무언가 모자란 것만도 아니다.


현자(賢者)는 이러한 이치를 깨우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나는 현자의 발뒤꿈치에도 닿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무상생의 진리를 알고는 있지만, 삶에서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쉽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버겁다. 있고 없음과 그 상대적인 가치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변화무쌍한 삶의 변주를 나는 인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유무상생의 법칙을 '희망'과 '절망'에 대입하려 애쓴다. 삶엔 대개 절망이라는 함정이 더 많고, 희망이라는 고명은 봄에 이르러 빼꼼히 그 싹을 틔우는 경이롭지만 아무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여기, 포로생활을 하던 제임스 스톡데일 미군 장교가 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때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동료들과 포로로 잡혀 있었다. 그는 살아남은 그룹에 속했다. 그 비결은 '합리적 낙관주의'였다. 반면, 죽음을 맞이한 그들의 동료들은 대비 없이 그저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봤다. 이번 크리스마스 땐 나갈 수 있을 거야, 잘 될 거야... 곧 나가게 될 거야... 바라던 바가 현실이 되지 않은 그들에게 상심은 쌓여갔고, 결국 상심으로 인해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합리적 낙관주의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어려운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것과 그러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 낸다. '절망이라는 진실'을 마주한 그들은 있는 그대로 그 진실을 수용하였고, '희망이라는 거짓'을 경계했다.


희망과 절망의 아이러니.

절망은 '현실'이고 희망은 '가상'이다. 가상의 세계에 빠져 있는 자에게 미래란 없다. 절망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희망은 절망이라는 땅에서 피어오르는 꽃이다. 아름답기는 하나, 약해빠졌다. 절망이라는 딱딱한 땅을 비집고 솟아오른 봉오리는 칭찬할 만 하나,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불 보듯 뻔하다. 수명도 그리 길지 않다. 꽃은 쉽게 시든다. 그러함으로 나는 희망을 품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라는 꽃이 무의미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절망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자는 뜻이다. 절망이라는 견고한 땅이 기반이 되어야, 희망이라는 꽃은 피어날 수 있고 그나마 더 오랜 수명을 유지할 수 있다. 대개 사람들은 땅 없이 꽃만 피우려 한다. 허공에 핀 꽃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닌 것을 바라보며 허둥대는 삶은 상심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절망은 진실이자 현실이다.

희망은 거짓이자 가상이다.


절망을 바탕으로 한 희망은 진실이자 현실이 될 수 있다.

절망을 직시하지 않는 현실은 허공에 흩뿌려지는 망상이자 헛된 바람이다.


절망을 사랑하기까진 못하겠지만, 그리하여 나는 절망을 배척하지 않는다.

더불어 절망 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에 내 삶을 걸지 않는다.


이것이, 삶이라는 전쟁터에 포로로 잡혀있는 내가 할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영역의 숭고하고도 처절한 발버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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