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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13. 2023

술이 술을 먹듯, 글이 글을 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걸 넘어 그것을 나는 거부한다. 거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태생적으로 술이 맞지 않는다. 몸이 받아주거나, 기분이 좋거나. 둘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술을 좋아할 수 백가지 이유가 생기겠지만 둘 다 아니라면 술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그러나 술을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말이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보면, 술이 술을 마시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란 걸 깨달을 때가 있다. 술이 술을 마시면 그 속도와 정도가 무섭다. 사람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술이 사람을 잡아먹을 기세다. 술이 술을 먹기 시작하면 그 맛이 달고, 없던 용기가 생기며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다음 날의 처절함은 예상도 못한 채. 대개 사람이 술 먹고 전에 없던 행동을 하거나 사고를 치는 경우는 십중팔구 술이 술을 먹을 때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꾸준히 글을 쓰다 보면, 온 힘을 다해 글을 쓰다 보면 술이 술을 먹듯 글이 글을 쓸 때가 있다. 하얀 여백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써지지 않는 글을 향해 한숨을 쉴 때. 어느덧 시작한 첫 문장이 생각보다 길게 내어 놓은 글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할 때. 분명, 쓸 것이 없다 생각했고 그 황량한 여백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걱정을 했었는데 어느덧 빽빽하게 무언가가 채워진 걸 알아차렸을 때. 아, 글이 글을 쓴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를 느끼게 된다. 술이 술을 먹으면 사고를 치게 되는데, 글이 글을 쓰면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글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다.

이러한 주객전도는 언제든 환영이다. 사람과 술이 그 주체가 바뀌면 화를 당하지만, 글과 사람이 주객전도되면 꽤나 흥미로운 일들이 생긴다. 알지 못했던 내가 불쑥 튀어나와 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죽더록 미운 사람과의 관계를 써 나아가며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걸 알게 되거나. 혹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사람 입장에서 보면 나는 더 이상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거나. 글이 글을 쓸 때, 그러니까 나와 글이 그 주체가 뒤바뀔 때 우리는 한 걸음 떨어져 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술이 술을 먹으면 자아를 잃게 되지만.

글이 글을 쓰게 되면 몰랐던 자아를 알게 된다.


몰랐던 자아를 알게 되면 또 다른 소재를 얻게 되고.

또 다른 소재를 얻게 되면 자아는 스스로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고로, 나는 술이 아닌 글에 취하는 것을 앙망한다.

자아를 잃게 하는 취함은 지양하고, 자아를 찾게 하는 취함은 지향하려 한다. 어떤 취함이 자아를 찾게 하고, 또는 잃게 하는지. 그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그 지혜마저도 글쓰기를 통해 더 쉽고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다는 것.


매일 써야 하고.

꾸준히 써야 하고.

계속해서 써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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