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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30. 2023

글쓰기, 그 궁극의 목적

사람의 욕구는 다양한 듯 하지만 결국 하나에 이른다.

깔때기 이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게 뭘까. 그건 '존재'에 대한 확인이다. 거슬러 올라가 볼까.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은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인정 욕구는 사람의 가장 큰 동기다. SNS를 하는 이유를 깊이 숙고해 보라. 팔로워가 하나 둘 늘 때 드는 기쁨과, 반대로 그러하지 못할 때 드는 좌절은 '인정받고 있다.'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의 그 어느 지점에서 드는 마음이다. 


'인정'이란 이 무서운 기재는 두 가지 원천으로 나뉜다. 

하나는 타인에게서. 또 하나는 자신에게서. 전자는 '외재적 동기', 후자는 '내재적 동기'로 연결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고래가 자신이라면 칭찬의 주체는 타인이다. 타인의 칭찬이 멈추면, 고래의 춤도 멈춘다. 외부 자극에 길들여지면 이러한 결과를 낳는다. 반면, 칭친의 주체가 자신이라면. 동기가 자가발전 된다면. 고래의 춤은 더 길게 이어질 것이다.


둘 중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헤아리려는 어리석음은 잠시 접어 둔다.

삶의 진리는 늘 어느 하나에서 오는 게 아니라, 애매한 경계에 서서 그것들을 잘 지휘하는데에서 발견된다. 애매한 지점은 내가 서 있는 위치다. 때로는 외재적 동기가 필요하고, 또 때로는 내재적 동기가 필요함을 알아차려야 한다. 외부 자극을 받아 불씨를 살리고, 스스로의 결심을 통해 불의 정도를 높여가는 것. 자가발전이 되지 않을 땐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타인의 도움이 끊겼을 땐 자가 발전 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다시, 우리네 욕구로 돌아가.

생존 욕구를 충족한 사람은 소속의 욕구를 거쳐, 인정 욕구로 접어든다. 반대로 생각해도 좋다. 인정받으려면 어느 집단에 소속해야 하고, 어느 집단에 소속하려면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 먹고 마시고 싸는 것들은 생명 유지와 관계되어 있고, 비로소 살아 숨 쉼으로써 자아실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죽도 먹지 못하는 사람은 연필을 들 힘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정받고 싶어 하고 존재를 돌아볼 수 있는 지금의 이 시점은 어느 정도 많은 욕구가 충족된 후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아실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궁극의 목적은 그것이다. 왜 사냐는 질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세어 보지만, 그것이 모이면 결국 자아실현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자아실현'이란 말이 참 재밌다. 현재에 무언가의 결실을 나타내게 하는 것. 앞서 말한 '존재를 확인하는 것'의 다른 말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자아실현과 직결된다.

글을 써서 뭐 하는가? 유명한 작가가 될 것인가? 돈 버는 글로 부를 쌓을 것인가? 다 좋다. 무엇이든 되면 된다. 존재를 확인하는 차원이라면. 그러나 꼭 유명한 작가가 되고, 글로 돈을 벌어야만 글쓰기의 목적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작가가 되어서, 부를 쌓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두고 자아실현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쓰기, 궁극의 목적은 자아실현이다.

나 자신을 현실로 불러와 그것의 결실을 맺어가야 한다. 쉽지 않다.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숨이 붙어 있는 한, 매일을 우리네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 숨 쉬는 이유. 밥 먹는 이유. 오늘도 괴로워하는 이유. 기쁨의 원인과 행복의 가치까지. 존재하려면 이러한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욕구가 충족되는 순간은 매우 짧고, 우리는 다시 존재의 증명을 위해 허덕이게 된다.


글쓰기는 존재를 '기록'하는 일이다.

기억은 기록을 지배한다. 기억은 느낌을 압도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는 잊힌다. 도파민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소비로 귀결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자아를 실현하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매일을, 매 순간을. 우리는 존재의 증명을 위해 여념이 없어야 한다.


소비적인 삶은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킨다.

생산자의 삶으로 꾸역꾸역 삶의 추세를 바꿔야 한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그 목적은 무엇인가.


쓰면서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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