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글쓰기>
글엔 분명 '온도'가 있다.
'온도'는 차가움과 뜨거움의 정도를 말한다. 재밌는 건, 이것이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치로 환산된 온도는 물이나 사물 또는 날씨로부터 온다. 수십만 년 경험을 통해 알아왔던 그 온도를, 현대 사회에 이르러 사람들은 수치로 측정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차가움과 뜨거움의 정도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온도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감정'에 기인한다. '감정의 온도'라 말해도 좋다. '그 사람은 참 차가워', '그의 손길이 참 따뜻했어'란 말 안엔 본명 '온도'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측정할 순 없다. 측정할 수 없는 온도는 사실에 가깝지 않다. 생각한 것을 감정으로 환산하여 내어 놓은 결과이며, 가늠할 수 없는 차가움과 뜨거움의 정도다.
이리하여, 나는 글에도 '온도'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글은 머리를 깨우친다. 또 어떤 글은 마음을 울린다. 머리를 깨우치는 글은 꽤 차갑다.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군가 내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특히 더 그렇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어떤가.
헤밍웨이가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 사람들을 울릴 소설을 단 6개의 문장으로 써보라는 것이었고, 그는 즉석에서 아래 글을 썼고 결국 내기에서 이겼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사람들이 헤밍웨이에게 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움직인 에너지는 물리적인 그것보다 크고, 물을 끓이는 온도보다 더 높다. 태산을 움직이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마음이라는 걸 돌이켜보면, 이 6개의 단어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온도가 얼마나 높은 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마음으로 쓰고 이성으로 퇴고'하거나, '이성으로 쓰고 마음으로 퇴고'한다.
냉정과 열정사이. 차가움과 뜨거움. 우리는 간혹 '미지근함'을 애매한 무언가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미지근함'은 사실 '차가움과 뜨거움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실로 엄청난 필력'을 뜻하기도 한다. 지나치지 않게 차갑고, 데이지 않게 뜨거운 온도는 아무나 만들어낼 수가 없다.
때론 차갑게.
때론 뜨겁게.
그리하여 미지근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진정한 필력.
글의 온도는 쓰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가 차갑게 썼더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뜨겁게 읽을 수도 있고, 나의 뜨거움을 차갑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글엔 '온도'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온도를 지어내고 있는가. 온도를 담아낼 만큼의 필력이 있는가. 어쩌면 그 힘은 진솔함에서 오지 않을까. 나는 어떤 온도로 살아내고 있는가. 살아내고 있는 온도를 글로 담아낼 수 있는가. 그 온도를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온도로 하여금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시시각각 써내는 글들이 살아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온도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