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히는 도로를 달리다 보니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짜증은 그렇게 주름이 된다. 혹시라도 옆 차가 나보다 빨리 갈까, 아니면 갑자기 내 앞으로 끼어드는 건 아닐까. 마음의 여유가 없다. 여유 없음은 그러한 각박함을 만들어낸다. 여유가 있는 세상은 아름답고, 너와 내가 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지만 반대의 경우엔 너는 모르겠고 나는 살아야겠다는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이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게 사람이지 뭐. 그러한 사람의 이기심을 직접적으로 자주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도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문득 옆차를 바라봤다.
뒷창문이 활짝 열려있어 눈길이 갔는지도 모른다. 멕시코 도로에선 창문을 모두 열고 달리는 차들이 대부분이다. 고산지대라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선선함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독 멕시코 사람들은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걸 좋아한다. 또 어느 차들은 에어컨이 고장 났거나, 아예 에어컨이 없는 클래식카가 즐비한 것이 창문을 열고 내달리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창문이 활짝 열린 옆 차의 뒷자리엔, 어느 아이 한 명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도로였지만, 아이의 미간엔 주름이 없었다. 똘망똘망한 눈의, 3~4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똘망함의 정도가 얼마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있는지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바람을 맞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에게서 나는 '순수함'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교통체증은 아이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다가오는 바람과, 스쳐 지나가는 각양각색의 차들이 그저 즐거움이지 않을까. 아이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멕시코 사람이 아닌, 동양사람이라서 그런지 순간적이지만 꽤 오랜 시간을 나에게 주시했다. 나는 살짝 웃음을 건넸고, 아이는 수줍은 듯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다시 운전에 집중하며,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했다.
아이의 순수함은 주변을 전염시킨다. 전염된 순수함으로 앞을 주시하니, 교통체증에 대한 짜증이 수그러들었다. 수그러든 틈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차올랐다. 순수함에 대하여.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빛에 대하여. 모두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한때는 가지고 있었겠지만, 지금 내게는 없는 것. 나의 순수함과, 나의 똘망똘망함은 어디로 갔는가. 삶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많아지면서 나는 그것들을 잃어버린 것 같다. 같은 차창을 바라보는 두 시선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이가 자라 운전을 할 때쯤, 녀석의 미간에도 주름이 깊게 베일 것이다.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뒷좌석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직접 운전하며 앞을 주시해야 하는 나이가 되면 이해할 것이다. 어른들의 짜증과 분노가 비단 교통체증으로만 유발되는 게 아니라는 걸.
반면, 나는 순수함의 전염을 만끽한다.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겠지만, 어른은 아이를 보며 순수를 동경한다. 예전 어린 시절로 잠시 돌아가, 나의 순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골몰한다. 그러다 보면 잊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고, 조금은 더 호기심에 차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조금은 더 아름답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움과 특별함을 찾는 건, 호기심과 순수함 덕분이다.
잠시 스쳐간 아이를 보며, 나는 순수함에 대해 떠올렸다.
호기심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며 비록 운전을 하고 있는 어른이지만, 그럼에도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마음. 세상과 싸워야만 한다는 때 묻은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 남들보다 조금은 천천히 가도 된다는 마음.
그 마음들이 모여 운전대를 잡고 조급해하던 나를 다독였다.
아마도, 차창 밖을 바라볼 때면 나는 그 아이를 떠올릴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아이도 함께.
아직 나는 순수함을 그래도 영영 잃지는 않았구나... 란 생각을 하며 방향 지시등 없이 갑작스레 끼어드는 차를 나는 기꺼이 들여보냈다.
분명, 이전보다는 무언가 차창 밖의 세상이 달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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