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과의 조화
앨범이나 일기, 그리고 그 옛날 끄적거렸던 것들을 들춰내다 보면 그렇다. 요즘은 디지털 시대이니 먼지를 벗 삼아 한쪽 구석에 놓인 노트북도 그것들 중 하나가 되었다. 전기 코드라는 탯줄을 붙잡고 다시 태어나길 바라던 그 노트북은, 심경의 변화로 인한 나의 갑작스러운 청소 욕망으로 발견되어 한줄기 빛을 얻은 것이다. 옛날 노트북 중에서도 그나마 최신형이었기에, 16:9와 4:3 사이의 어중간한 화면 비율을 가진 그 친구는 반가웠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익숙했다. 화면을 들어 올려 그 친구의 기지개를 도왔다. 뻑뻑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아날로그 대비해서 디지털의 장점이자 단점은 세월의 흔적이 그리 많이 녹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먼지를 조금 닦고 전원을 연결하면, 나는 다시 그 친구를 사용하던 그때로 간단히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디지털이라고 해도, 오래된 세월은 스며들어 있었다. 왕년의 속도보다는 한참 느린 부팅 시간이 그 정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서서히 잠을 깨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단 몇 분에 불과한 그 시간에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는 빠르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폴더를 열어 심장의 심장 저 안쪽으로 한 걸음씩 더 들어가 보자니, 내가 했던 행적들이 수두룩하다. 스스로를 향한 디지털 포렌식과 같았다.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사진으로 어떤 추억들을 담으려 했는지가 고스란했다. 재밌는 건, 아날로그는 빛바랜 그 무엇으로 세월의 오래됨을 이야기 하지만, 디지털은 저화질과 용량으로 그것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진과 영상 등에서 느껴지는 저화질의 그것이 어쩌면 아날로그의 감성을 따라 하는 듯했다. 많은 추억과 행적들이 있었지만, 그것들 속에서 가장 인상 깊게 발견한 것은 바로 나의 고민들이었다. 취업을 앞둔 자기소개서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진로에 대한 문제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 밤잠을 설쳤을 듯싶다.
그러던 와중에 난 잊고 있던 한 영상과 마주했다. 2000년 대 초반 내가 만들었던 뮤직 비디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UCC 등이 아주 흔한 때지만, 그때는 아날로그가 더 대세였던 때다. 6mm 비디오카메라로 담은 영상은 몇 시간의 시간을 투자해야 겨우 디지털로 변환될 수 있었다. 다시 그 용량을 감내하기 힘들었던 컴퓨터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은 그 당시 전문가의 것만 있었고, 내 컴퓨터는 아마추어였으니 동영상을 편집하던 내내 프로그램 멈춤과 꺼짐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게 탄생한 그 영상을 잊고 산 내게, 오랜만에 기지개를 켠 그 친구가 가슴을 열어 나에게 그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순간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드라마 속 주인공이 한 차례 충격을 더 받고 나서 모든 것을 떠올리는 것처럼. 일상의 것들을 찍고 그것을 소스로 하여 찍은 그 뮤직 비디오에는, 철저하게 나에게로 향한 질문이 있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때라 진로와 미래를 앞두고 했던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 묻고 있었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당시의 어색한 연기나 아마추어의 어눌함, 그리고 돈을 표현하려 했으나 수중의 돈이 없어 1천 원짜리를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며 웃었다. 얼굴은 웃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도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다. 그리고 영상 안에 나열한 돈과, 학력, 그리고 대박에 대한 것을 그대로 갈망하고 있는 직장인의 모습이 서글펐다. 그 질문과 고민을 한 후 15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 영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이 더 많다는 것. 그리고 해야 하는 것들을 통해 더욱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는 것. 하고 싶은 것들 중 많은 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들도 있다는 것. 다만, 내가 알아채거나 깨닫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것들을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내 이름으로 책을 하나 내는 것이었다. 어느새 내가 쓰는 글을 한 출판사가 좋게 봐주어, 나는 곧 탈고를 해야 한다. 재밌는 건, 내가 원했던 것은 책을 내는 일이었지만, 해야 하는 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야 하는 건' 그렇게 하기가 싫고 두렵다는 것이다. 즉, 원하는 건 출판인데, 하기 싫은 건 글쓰기라는 아이러니함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시, 사람은 해야 하는 것을 통해 성장해 간다. 그것들을 회피해서는 원하는 것들을 이루지 못한다. 물론, 모든 해야 하는 일들이 원하는 일과 부합하는 것은 아닐 터. 그 속에서 경험과 지혜를 찾아야 한다.
생각해보니, 그 영상을 만들 당시 나의 꿈은 방송국 PD였다. 먹고 살기를 위해 직장에 취업을 하고 나서도 몇 년 간은 지상파 방송국에 입사 지원서를 냈던 것 같다. 꿈이 명확했다면, 다른 길을 통해서라도 PD를 했어야 했지만 당장 생계를 책임지어야 하던 나에게 선택의 여유는 없었다. 물론, 나의 선택이었지만. 하지만 해야 하는 것들을 해가며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직장 생활을 하며 배운 수많은 깨달음들은 나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글도 쓰고 있다. 소설과 작사, 그리고 에세이와 멘토링까지. 언젠간 이러한 나의 자산들이 책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와 노래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그러면 포기했던 방송국 PD의 꿈에 조금은 다른 쪽으로, 그러나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최대한 즐기면서. 해야 하는 일들을 해가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가면서.
누군가의 팔을 비틀어 어떤 자백을 받아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마음을 수천번이라도 비틀어 그것을 받아내고 싶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 글을 읽는 젊음들도,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고 싶다면 한 번 철 지난 옛 컴퓨터나 하드 디스크를 열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때의 생각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해 보길 바란다. 그때를 바라보되, 현재의 자신을 견고히 바로 잡아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조화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물론, 나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 멘토링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나에게 해야 할 말을, 객관화하여 좀 더 명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스스로에게 멋쩍은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는 것.
우린 아직 젊다.
그리고 그것이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주된 원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