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글쓰기 앞에 주저하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평범한 내가 쓸 게 있을까?
그런 내가 쓴들, 누가 관심 가져 주기나 할까?
아는 게 없는 내가 쓸 게 있을까?
독서를 많이 하지 않는 내가 무얼 쓸 수 있을까?
이 모든 건 장벽이 되어, 나로 하여금 '역시 나는 안돼'라는 익숙한 읊조림을 하게 했다.
그럼에도 영혼의 숨을 쉬고 싶어, 살고 싶어 꾸역꾸역 글을 써 나아갔을 땐 많은 것이 변했다.
평범함은 공감이 되고.
평범함을 쓰다 보니 특별함을 발견했고.
아는 게 없다는 생각보단, 무엇을 모르는 지를 알게 되었고.
읽지 않고도, '내어 놓는 글쓰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건 '아는 게 많아야 쓸 수 있다'란 통념에 기인한다.
통념은 편견이 되고, 편견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강압과 폭력이 되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앞에 군림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허상이다. 쓰면 알게 된다. 그런데, 여전히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쓸 수 있냐고?
주위를 둘러보자.
정보가 넘쳐난다. 이 시대는 정보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다.
무얼 아는지, 무얼 모르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지 못하는 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면 순서가 틀렸다.
읽고, 정보가 많아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알고 싶은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이걸 알지 못하니, 모든 정보는 쓸데가 없고 이러한 불안감을 틈타고 들어 세상은 불안감을 조성하여 필요도 없는 정보와 물건을 사라고 강요한다.
글쓰기는 아는 걸 쓰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걸 써내는 것이다.
모르는 건 무엇인가? '나 자신'이다. 모르겠는 나 자신을 써야 한다. 끄집어내야 한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생각과 피상은 사라지기 일쑤이니, 이걸 활자로 변환해야 한다. 그게 바로 글쓰기다. 실체화시키는 과정이다. 활자는 문장이 되고, 문장은 실체가 되며, 실체는 우리 자신을 규명하고 증명하는 잣대가 된다.
아는 걸 쓰려하지 말고, 모르겠는 나에 대해 쓰려고 하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그동안 알아야 쓸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울분을 감추고 있던 내 생각과 감정들이. 그동안 놔주지 못하고, 꼭 붙들고 있던 것들까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시간이 축적될수록.
삶은 더 고단해지고 피폐해질 것이다.
아는 걸 쓰려고 필요도 없는 지식과 정보를 구하는 동안.
자아는 더 고단해지고 피폐해질 것이다.
지금 당장.
쓸 것. 모르는 것에 대해. 자신에 대해. 내어 놓아야 할 것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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