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에세이>
때론 다양하고 어처구니없는 투정들이 여러 생각과 맞물려 표출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살게 했냐는 것이 대표적이다.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때가 있지만,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는 것이고, 존재가 기쁨이 아닌 고통이 될 때, 그렇다면 이 힐난은 누구에 해야 하는 것인지.
나와의 상의도 없지 나를 살게 했다?
그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죽음‘이라는 운명을 부여한 것도 괘씸하다. 아…이 누구의 농간이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불합리하고, 어쩔 수 없는 투정이 터져 나온다.
중년이 넘어가는 지금, 이제 나는 조금씩 존재의 이유를 받아들이는 중이다.
불합리하고, 자체가 고통이고,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어처구니없는 여정을. 죽음이 끝이 아니길, 아니, 죽음에 이르러 멱살 잡고 따져 물을 수 있도록 어느 절대자를 만나길. 조금 두려운 건, 그 절대자 또한 누군가로부터 존재를 부여받은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를 모를 것이고, 나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없을 테니까. 나이를 먹어도, 세월이 흘러도. 투정 없이 존재를 받아들이는 건 영 쉽지가 않다.
존재는 그 자체로 불합리적이다.
상의되지 않은 존재는 더 그러하다. 그 누구도 상의하고 자신의 존재를 탄생시키지 않았다. 죽음 또한 합의되지 않은 결정이다. 이러한 가운데, 살아감의 몫은 다름 아닌 우리 것이고, 기쁨도 있지만 고통이 더 많은 삶의 무게는 우리가 짊어져야 한다.
어떤 장단에 맞추어야 할까.
너의 장단에?, 나의 장단에?
애석하지만 ‘너의 장단‘은 알 수가 없고, 또 하나의 변수인 ‘세상의 장단‘은 복잡 다난해서 예측하거나, 예측하더라도 제대로 대응하기가 매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나의 장단‘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 장단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너와 세상의 장단을 알까. 그 둘의 농간이 아무리 기괴해도, 내 장단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조금은 더 잘 그것에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깊은숨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쉬며.
타인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추면 된다. 오롯이 나에게로 향하는 숨을 느끼며. 나의 장단에 귀를 기울일 것.
어렴풋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내 장단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 장단은 멈춘 적이 없고, 애써 그것을 듣지 않았던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걸, 금세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