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심리 에세이>
어렸을 적 외로움은 두려움이었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면 타인과 제대로 교류하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생각은 사회성이 부족하다거나 그러하기에 친구가 많이 없다는 자책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자책을 피하기 위해 나는 평소보다 몇 마디를 더했고, 괜히 외향적인 척 연기했으며, 사지도 않을 밥이나 굳이 필요 없는 만남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쓸데없는 일이었구나... 란 생각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린 존재가 얼마나 외롭고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란 생각에 과거의 나를 꼬옥 안아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니, 이젠 외로워도 두렵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외로움을 즐기려 한다. '외로움'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고독'은 '능동적인 외로움'이라고나 할까.
'고독을 씹는다'란 표현이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마치 음식처럼 입에 넣고 천천히 곱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듯. 씹을수록 전해지는 풍미는, 이전엔 알지 못했던 외로움의 맛을 알게 한다.
시대가 하 수상하다.
또한, 매우 소란스럽다. 귀를 막아도, 눈을 감아도. 듣고 싶지 않은 걸, 보고 싶지 않은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눈을 떠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수 만개의 광고를 접해야 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걸 사게 되고, 왜 엮여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피곤하기 짝이 없다. 생존 본능에 따라 한 명이라도 더 알면 좋은 거 아닐까... 란 생각이 들다가도, SNS에서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인연과 필요성에 의해 사회에서 맺어진 만남들로 인한 피로감이 커지는 걸 볼 때면 우선 나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꼭 필요한 인연이 아니라면, 굳이 넓혀갈 필요 없다.
어른이 될수록, 인연은 줄여 가는 게 맞다. 반대로 말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또 다른 인연을 만들려 하기보단 그들에게 충실한 게 낫고, 그 외의 시간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게 백번 낫다.
사람은 외로울 때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외롭지 않으려 겉돌다 보면, 자아는 잊히고 타인에게 맞추려는 허상의 껍데기만 남는다. 외로움을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고독을 씹으면, 그제야 자신이 보인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외로움과 고독의 선물이었다.
왜 고독함이 좋을까.
설명할 방법은 없다.
강요할 생각도 없다.
타인의 외로움에 관여할 시간도 없고.
타인의 외로움에 개입할 수도 없으므로.
그저, 오늘도 외로울 수 있는 시간을 찾아.
고독이란 여행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