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심리 에세이>
탕. 탕. 탕.
세 발을 쏜다. 탄착군이 형성된다. 잘 쏘았다면 가운데 구멍이 하나이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작은 또는 큰 삼각형이 형성된다. 삼각형이 아니라면 문제다. 쏠 때마다 무언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삼각 탄착군이 가운데 점의 상하좌우에 있다면 총의 가늠자 또는 가늠쇠를 조절하여 가운데로 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후, 다시 세 발을 쏘아 탄착군이 가운데에 근접해지면 영점 조준 사격은 끝이 난다.
'영점 사격'은 매우 중요하다.
군대에서 총을 지급받은 후, 자세를 잡는 연습을 피가 나도록 한 뒤 실탄을 쏘기 전에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영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총을 가진 의미가 없다. 내가 쏜 총알이 어디로 날아가는지도 모른다면 그건 무기가 아니라 무용지물이다.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먼 거리에서 목표물을 맞히기 위한 게 사격의 목적이고, 그래야 총이라는 무기의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는 것이니까.
살다 보면 우리는 방황을 하게 된다.
이러한 때, 나는 군대에서 했던 '영점 조준'을 떠올린다. 삶에 빗댄다면, 어쩌면 그건 '영점 조절'이라 말하는 게 더 맞겠다. 동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경쟁사회로 접어들면, 우리는 우선 뛰고 본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하는지도 모른 채. 나 행복하자고 하는 것들인데, 무언가를 이루고 나면 거기엔 정작 내가 없다는 걸 발견하며 허탈함을 느낀다. 이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 깨닫는다.
영점 조준과 영점 조절이 잘못된 게 아닐까. 내가 바란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과 목표는 구분하고 있는가. 내가 바랐던 위치에 탄착군이 형성되어 있는가. 1,000발의 사격을 했는데, 정작 총알은 알 수도 없는 곳에 박혀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우두커니 서서 '서서 쏴' 자세를 취해본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있다고 상상한다. 내가 조준하는 곳은 어디인가.
행복에 중독되지도, 불행에 압도되지 않도록.
가장 고요한 곳은 태풍의 눈 속이며, 가운데에서 균형을 잡아 올바르게 서 있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삶의 근원임을 나는 깨달았다.
행복하려 하면 오히려 더 불행해지고.
불행하다고 툴툴대며 이미 옆에 있는 행복을 몰라본 적이 많다.
이를 돌아볼 때, 원하는 곳을 바라보지 않고 이곳저곳에 몸과 마음을 난사하고 있는 형국이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어쩌면 '영점 조준'과 '영점 조절'은 매일 반복해야 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삶이란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우리의 가늠쇠와 가늠자를 늘 흐트러뜨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