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심리 에세이>
삶은 섹스로 전염되는 불치병이란 말이 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절묘하고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생물은 번식이라는 사명과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연애, 사랑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이러한 생존 법칙과 본능은 삶을 참으로 크게 어지럽힌다. 먹고사니즘으로 바쁜 나에게도, 단 하나 지워지지 않는 의문은 '나는 왜 태어났을까'이다. 부모님 사랑의 결실이라는 표현으로 퉁치지 말자. 번식의 연속 어딘가에 자리한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라 치부해도 좋다.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이러한 탄생과 지리한 삶 그리고 지리함을 한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죽음이라는 설계를 누가 했는가 이다.
영문을 모르는 탄생.
의미를 모르겠는 삶.
모든 걸 허무함으로 축약하는 죽음까지.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불장난 같은 불치적인 삶에서 우리는 어떠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의미'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람은 알 수 없는 영문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의미를 찾지 못하면 무속에 기대기도 한다. 이러할 운명, 저러할 숙명. 운에 따라 휘둘리는 삶. 아니, 얼마나 삶이 불명확하고 기가차고 아무런 의미가 없으면 이러한 것들까지 파생되는가.
출생은 무릇 확산과도 같지만.
죽음이라는 회귀는 이러한 확산을 무색하게 한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뭐 하러 태어나는 것인가?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건 각자의 몫이라 쳐도. 그렇다면 최소한 왜 태어나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영문도 모르는 존재를 수백만 년 동안 나몰라라 하는 절대자의 뻔뻔함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걸까.
때론, 이러한 푸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푸념은 영문도 모르고 태어난 존재의 작지만 유일한 반항법이란 걸 상기하면, 푸념을 하는 내가 조금은 덜 한심해 보인다.
오늘 하루.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하루라도 더 살아보자는 사람과, 어차피 죽을 날은 오고야 만다는 것을 안 사람의 삶의 태도는 어떻게 다를까. 적절하게 그 둘의 태도를 섞어,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존재의 푸념은 여기까지.
태어난 김에 살든.
죽을힘에 다해 살든.
주어진 운명에, 푸념이라는 반항 조금 섞어.
그저 하루 한 발, 출생으로부터 멀어지고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숙명을 받아들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