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심리 에세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 냄비 하나가 필요하여 작은 수납함 앞으로 향했다.
냄비를 꺼내던 중, 작은 채를 치는 바람에 냄비와 벽 사이에 채가 꼈다. 자칫 잘못하다간, 채가 수납함 뒤로 넘어갈 판이었다. 제발... 넘어가지만 마라. 넘어가면 수납함을 다 드러내어 꺼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지 않는가. 더더군다나, 인덕션 위에는 고기가 지글지글하고 있으니... 빨리 가봐야 하는데. 너무 익으면 맛이 없을 텐데... 이러한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찰나.
결국, 채는 수납장 뒤로 넘어가 버렸다.
나는 한 동안 그저 멍하게 서 있었다.
짜증이 밀려왔다. 수납함 뒤로 넘어간 건 그깟 채 하나 일 수 있지만, 나는 삶의 부조리에 대해 떠올렸다. 온갖 철학과 사상, 신학에 대한 이론들이 뒤죽박죽 되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어나면 안 될...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왜 이토록 쉽게 일어나는 것일까?
결국 요리하던 걸 멈추고, 나는 수납장을 끌어내어 뒤로 넘어간 채를 꺼내었고 넘어갔었는지도 몰랐던 작고 얇은 프라이팬 두 개를 더 꺼내었다.
잊고 있던 프라이팬을 꺼내라는 신의 계시인 것일까? 아니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그러한 일이 더 일어나는 삶의 부조리 때문일까.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요리를 이어갔다. 살아가는 데 있어 이러한 일을 꼭 맞닥뜨려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 대체?
이러한 일을 자주 겪으며, 나는 '당위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성. 그 어떤 경우에도 나쁜 일은 나에게 와서는 안된다는 당위성. 이 당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당위성의 당위는 정당한가? 그 정당성은 누가 누구에게 부과하는 것인가?
행복은 잡으려 하면 더 도망가고, 불행은 오지 말라 외치면 어느새 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이 모든 게 '당위성'의 '부조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조리'는 정말 얍삽하고 괘씸한 삶의 어느 공식인데, 이것을 만든 절대자를 나는 원망한다. 부조리에 놀아나면 너무 약이 올라서다. '당위성'은 본능이다. 누구나 행복해하고 싶어 하고, 누구나 편하고 싶고, 누구나 쉽게 살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는 순간, '부조리'는 자동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절대자에 심심한 박수를 보낸다.
결국 나는 잃어버렸던 (잃어버렸는지도 몰랐지만) 프라이팬 두 개를 찾아냈고, 끝내 요리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과정에 귀찮은 일이 좀 있었지만, 결과는 그냥저냥 좋았던 걸로. 물론, 굳이 채가 수납장 뒤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란 투덜거림과 함께. (나는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만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날 때, 나는 '당위성'을 떠올리려 한다.
그러해야 한다...라는 것은 없다. 그러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도 없다. 뒤로 떨어진 채를 꺼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스불을 끄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수납장을 드러내어 채를 꺼내면 될 것을. 마침 잃어버렸던 프라이팬 두 개도 추가요.
삶은 참 약 오른 숨 쉬기의 연속이지만,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어야 내가 살 수 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일어날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그것들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게 남겨진 숙제는.
결국, 그러한 것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