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포티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스테르담 심리 에세이>

by 스테르담
나만의 시간 속에서 사는 법,
영포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공통 개념을 뜻한다.

최근, '영포티'라는 말이 스멀스멀 이데올로기화 되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굳건하게 자리 잡으면, 그건 어떤 하나의 기준이 되어 폭력성을 드러낸다. 당신은 영포티인가 아닌가. 용포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좋게 생각하는 이유? 그 반대인 이유?


최근 '영포티(Young Forty)'라는 단어는 희미한 비웃음과 함께 쓰인다.

분명 초기에는 그 의미가 달랐다. 40대임에도 불구하고 트렌디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하며, 현역으로서의 능력을 잃지 않은 '긍정적이고 멋진 중년'을 칭하는 말이었다. 중년을 한참 지나고 있는 나 또한, 영포티의 그러한 긍정적인 부분을 극대화하자고 다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서서히 변질되어, 이제는 '젊어 보이려 안간힘을 쓰는' 불안한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 변화의 핵심은 '능력'에서 '외모'로, 그리고 '자발적인 삶'에서 '필사적인 집착'으로의 이동이다. 젊음을 갈망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과 같다. 누가 늙고 싶어 하겠는가. 누구나 세월의 흔적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건강하게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스스로를 가꾸는 노력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누군가의 자발적인 관리가 다른 이들의 삐딱한 시선과 만나는 지점이다. 그 시선은 '쟤는 왜 저렇게 애쓰지?'라는 냉소이거나, 혹은 '나도 못 하는 걸 하네'라는 질투의 다른 이름일 때가 많다. 중년의 젊음을 향한 시도는 종종 그들의 불안이 투영된 사회의 거울 앞에서 심판받는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이 '영포티'라는 이데올로기에 무의식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 놓은 젊음의 기준, 즉 탄력 있는 피부나 최신 유행의 옷차림 같은 외적인 증거들을 쫓느라, 정작 중요한 내면의 시계를 멈춰 놓은 채 남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남이 정한 속도와 템포에 맞추기 위해 내 삶의 고유한 리듬을 잃어버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중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일 것이다.


중년의 아름다움은 젊음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그것은 '덜 늙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 나이의 밀도'에서 나온다. 내면의 충실함,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깊이, 그리고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잡는 단단함. 이것들이야말로 모든 중년의 진정한 'Young'함이어야 한다.


이제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시선으로 나를 돌보아야 할 때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시간에 맞는 성장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영포티는 외부의 기준이다.

내 삶은 스스로의 기준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Young Forty'가 아니라, 'Authentic Forty'가 아닐까.

남의 시간을 모방하며 서툰 연기를 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내가 설정한 목표와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용기. 그 용기라면 어떠한 종류의 나이와 세대라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영포티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가 보면.

그 용기를 찾을 수 있겠지. 분명.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