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배울 때 주의할 점

<진짜 멕시코 이야기>

by 스테르담
언어 능력이라는 환상,
스페인어 마스터의 3가지 버그


스페인어와는 전혀 상관없던 내가, 멕시코 주재원으로 (갑자기) 발령받은 건 벌써 4년이 넘은 어느 지점이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가장 큰 두려움은 역시나 '언어(스페인어)'였다. 유럽 주재원으로 있을 땐, 모든 법인이 영어가 공통어였으나 멕시코는 그러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인 모두가... 한국 사람들조차 스페인어를 사용했고 모든 회의나 바이어 상담도 스페인어로 진행되었다.


스페인어를 듣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와 펜으로는 그 한계를 느껴, 주말에 밥을 사가며 현지 친구들과 죽도록 이야기했다. 사무실에선 최대한 영어를 쓰지 않고 말이 막히더라도 '니들이 알아듣겠지...'라는 마음으로 스페인어를 썼다. 그리하여 나는 부임 한 지 6개월 만에 스페인어로 일상과 업무를 큰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름의 자부심도 있고, 스페인어를 배우며 이전에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수많은 브랜드와 단어의 어원을 공부하며 생각의 지경이 넓어졌음이 나는 참 좋다.


그러나...

모든 것엔 빛과 어둠이 있는 법.


스페인어를 하게 되니, 부작용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성과에 대한 기회비용이랄까. 새로운 OS가 기존의 시스템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버그(Bug)'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첫째, 영어를 잊는다. (그렇다고 스페인어가 완벽한 것도 아니면서...)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모국어가 아닌 제2외국어, 즉 영어가 급격히 퇴화하는 현상이었다.

스페인어 회화가 일상화되면서 내 두뇌는 영어라는 저장고에 굳이 접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영어 단어는 스페인어와 뒤섞여 알 수 없는 혼종이 되었고, 한때 술술 나오던 영어 문장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는 TV 리모컨처럼 떠올리지 못해 말을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스페인어로 열띤 토론을 벌인 뒤, 영어를 해야 하는 회의에선 마치 혀가 마비된 것처럼 느껴졌다. 언어 능력이라는 것은 정체된 자산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용하지 않으면 낡아버리는 휘발성 능력임을 절감했다.


둘째, 영어 발음이 안된다. (혀가 안 굴러...)


스페인어의 자음은 되게 발음해야 하고, 알파벳 'R'을 제외하곤 혀를 굴려야 하는 단어나 문장이 거의 없다.

멕시코는 미국 근처인데... 왜 대다수 국민들이 영어를 하지 못할까...라는 의문이 사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페인어 자체가 미국에도 널리 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페인어로 다져진 혀는 영어를 말하기에는 그리 유연하지 않다.


또 하나.

'Come'이란 단어는... 스페인어를 몰랐을 땐 당연히 '컴(오다)'라고 읽겠지만, 스페인어를 말해야 하는 나는 그걸 '꼬메(먹어!)'라고 먼저 떠올린다.


단어도 그렇고, 발음도 그렇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가 명백하다.


셋째, 상대방도 스페인어를 말할 것이라는 착각?


대륙에 있거나, 광범위게 사용하는 언어 (ex.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것이란 전제를 한다.


스페인어를 아예 하지 못했을 때, 뉴욕 한 복판에서 사진 찍어 달라는 말을 어느 중남미 모녀가 스페인어로 나에게 말할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중남미가 아닌 미국에서, 그것도 아시아인인 나에게 스페인어를?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멕시코 사람과 외국 사람 (미국이나 유럽)이 구분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에도 나는 우선 스페인어를 말하고 본다. 상대방이 스페인어를 할 거라는 착각스러운 확신(?)과 함께.




스페인어를 배운 걸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의 지경이 넓어지고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게 되어 좋다.


오히려 두려운 건, 한국으로 복귀한 뒤 스페인어를 잊을까 하는 것이다.

잊고 싶지 않다. 영어든, 스페인어든. 번갈아가며 공부와 연습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의 언어를 알게 된다는 건,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몇 안 되는 큰 축복 중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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