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사람은 '존재'를 '증명'하는 게 숙명이다.
한 시라도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면 사람은 우울해지고 생존 확률이 낮아진다. 삶의 의미가 없다고 느끼거나 의지가 격하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절대자는 모든 생물에 '숨'을 불어넣었다.
숨은 한 시라도 쉬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자가 우리로 하여금 숨을 쉬게 만든 건, 한 시라도 쉬지 말고 존재를 증명하라는 명령이자 장치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다.
숨을 쉬고 살아남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본질 그 이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네 옛 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유일한 종이다.
어쩌면 존재에 대한 자유라는 형(刑)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는 우리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에 대해, '인간의 요구와 세계의 비합리적인 침묵 사이의 대립에서 태어난다'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통쾌한 해석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감정'과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세계와 대립하며, '감정'과 '의미'를 만들어내려 해석하는 인간 사이의 처절한 싸움. 이 또한 저항을 통해 '존재'를 인식시키려는 누군가의 설계가 아닐까 한다.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면적으로는 존재해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말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말 아닌가. 그러니까 이 말은 존재하기 위해 생각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존재하고 있다면 생각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아껴두기로 한다.
아직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으니까.
다만,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
'존재'
'증명'
이를 함축하는 단어가 결론적으론 '생각'인데, 다만 '생각'은 매우 휘발적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나 조차도 잊기 쉽다. 잊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 찰나.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짧은 시간.
그러니 남겨야 한다.
휘발이 강한 것일수록, 활자로 단어로 문자로 써야 한다.
그것이 나를 증명할 것이다.
수많은 유혹으로 인해 존재를 잊거나, 요즘은 AI로 인해 생각할 시간도 줄어드는 만큼. 나를 증명해야 할 당위는 더욱더 분명해지고,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우리는 이것을 적고 써 박제해야 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건.
그리하여 바로.
'글의 증명'
내 존재를 누구보다 잘 증명해 주는 건 바로 '나의 글'이며.
내 글을 쓰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임을.
또한 그 글을 읽는 가장 최초의 독자도 '나 자신'임을.
우리는 쓰면서 깨달아야 하고.
쓰면서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