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사람에겐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다.
욕망의 근원은 '생존'이다. 숨이 붙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칙은 살아남는 것이다. 원시 시대엔 사람도 동물과 다르지 않았다. 죽지 않기 위해 먹고, 죽지 않기 위해 숨고, 죽지 않기 위해 마시고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이르러 생존이란 과업은 유지되고 있으나 그 방식과 개념이 바뀌었다. 숨이 붙은 건 살아있는 것이란 명제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좀비라는 허구의 존재가 태어난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인간 내면에 있는 정서적, 영혼적 죽음을 투사한 것이 좀비인 것이며, 직장인은 때론 영혼 없는 좀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전의 생존은 '죽지 않는 것'이었지만, 작금의 생존은 '잘 사는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철학의 양대산맥인 '유물론'과 '관념론'을 먼저 이야기해야 하겠다. 둘의 차이는 '물질'이냐 '정신'이냐다. 물질이 정신을 결정하느냐, 정신이 물질을 결정하느냐. 자본주의 사회로 인류의 발전 방향이 정해진 걸 보면, 나는 유물론에 한 표를 주고 싶다. '견물생심'이란 말은 유물론을 아주 잘 빗댄 표현이데, '잘 사는 것'과 '물질 그리고 돈'의 유착 관계가 지금의 시대에 더 크다는 건 그저 간과할 수 일이 아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지만, 돈이 없으면 행복의 확률이 확연히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행복해야 하는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인데, 그렇다면 세상은 행복만으로 가득 차야 하는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생존'에 이르게 된다. 행복해야 생존의 확률이 높아지고, 우울함은 그것의 확률을 확 낮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람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생존욕구가 크다는 것, 그리하여 문명을 발생시키고, 문화와 이기를 만들어낸 전무후무한 존재. 세상의 중심이라 착각할 정도로 장성한 인류는 원시적 위험에서 벗어났으나 이제는 그보다 큰 사회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자연에서 멀어지고, 온갖 우울과 갈등 속에 처박혀 있는 우리. 물질에 지배되지 않은 자가 없는 현실. 돈 앞에 인간성은 이미 아무것도 아니게 된 세상. 자본과 물질로 종(種) 스스로의 계급을 나누고, 서로 갈등하고 무시하고 고립하는 역사적 반복.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강한 종이겠으나.
강한 종의 이면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약함이 가득하다.
현대인 중,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배불리 먹고, 여행하고 싶은 대로 떠나고, 역사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돈이 철철 넘치는 시대임에도.
어쩌면,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생존의 확률을 가장 잘 끌어올리는 시작점이 아닐까 한다.
그 나약함의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소비하고 탕진하고 자아를 외면한다.
그러다 찾은 글쓰기는,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내가 쓰는 이유.
나는 나약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쓰고, 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