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간에라도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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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 아이는 나의 여행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아니 같이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그 날의 작은 소동에 대한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과, 남자친구와의 여행이 취소된 복합적인 이유라 말했다.
아, 그리고 그때 내가 계산한 그 민트 티도 또 하나의 이유였다.
나 홀로 여행이라는 무계획을 세웠지만, 어째 그 아이를 밀어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여행 중간에라도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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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자기가 네덜란드에서 몇 년 살아봤으니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여기가 좋고 저기가 좋고 안내를 하던 그 아이는, 마치 자기가 여행 온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들리기로는 꼭 자기가 가보고 싶은 곳을 설명하는 듯했다.
알아서 재잘재잘대는 모습이, 같이 다녀서 나쁠 것 같진 않았고 오히려 나를 즐겁게 할 것 같았다.
이 아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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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의 나이차이는 띠동갑을 훌쩍 뛰어넘었다.
자신은 여기서 공부를 마치고 여기 이 곳 아니면, 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의 한국을 생각하면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 오히려 이 곳에서 직장을 못 구해 한국으로 다시 되돌아 갈까, 그것이 가장 두려운 걱정거리라 했다.
난 그 걱정이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해외에서 받는 차별과 서러움이, 한국에서 받는 그것보다 어느새 덜 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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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갈까를 누군가와 고민하게 될지 정말 몰랐지만, 함께 고민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무계획 중 일어난 일이니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누어 가던 중, 재미있는 것은 이 아이도 네덜란드에서는 별로 가 본 곳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참... 자신이 네덜란드에 사니 여기는 동네라 느껴지고, 가고 싶은 곳은 다른 유럽 나라였다는 것이다.
나는 네덜란드를 여행하기 위해 멀리 한국에서 맘먹고 왔는데, 여기 사는 이 아이의 여행지는 모두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다른 '유럽' 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그런 곳을 가야 정말 '유럽'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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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아이가 참 부러워 보였다.
아버지가 없어 어학연수 한 번 못 가본, 배낭여행을 목전에 앞두고 날아가버린 그때의 좌절과, 유럽 여행은커녕 써보지도 않은 커다란 빚을 안고 죽느냐 사느냐를 진심으로 고민해야 했던 나의 그때가 바로 딱 이 아이의 나이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공부하고, 더치 남자친구를 만나 동거하고, 여기저기 유럽 여행을 다니며 젊음을 만끽하는 모습이라니... 철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나와는 너무 다른 젊음의 모습에 어쩌면 질투가 나서 일까?
나의 과거가 지금 이 아이의 모습을 너무나도 크게 부러워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질투가 날 만큼.
하지만, 이 아이가 그리 밉지만은 않았다.
이 모든 일련의 것들은, 내가 가족을 잘못 택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요즘은, 가족도 잘 선택해서 태어나야 하는 시대이니까.
그렇지 못했다면, 닥치고 열심히 그리고 잘 살아야 하는 시대이니까.
Place Information
1. Leidseplein: 그 아이를 만나기로 한 광장
- Leidseplein, Amsterdam, Netherlands
2. Cafe Reynders: 처음으로 개인적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곳
- Leidsestraat 6,1017 PT Amsterdam, Netherlands